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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일본 시인의 용기있는 고백…'처음 가는 마을'

처음 가는 마을
처음 가는 마을[봄날의책 제공]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윤동주 '서시'의 구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을 서툰 발음으로 읽으며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고 또 가서 넘어진다 하여도 싸리꽃 들녘'을 다짐했던 일본 시인.

한국을 사랑했던 이바라기 노리코의 대표 시를 모은 시선집 '처음 가는 마을'(봄날의책·정수윤 옮김)이 출간됐다.

1926년생으로, 전쟁을 겪으며 느꼈던 아픔과 슬픔을 시인은 여성의 감수성으로 솔직하지만 의연하게 그려냈다.

그녀의 시는 단순하지만, 주제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깊은 뜻과 단호함을 담고 있다.

"어렵지 않은 시어로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는 일, 그리하여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가게 하는 일, 이것이 이바라기 노리코가 시인으로 살면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해온 작업이다."('옮긴이의 말' 중)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거리마다 와르르 무너져 내려 / 엉뚱한 곳에서 / 푸른 하늘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곁에 있던 이들이 숱하게 죽었다 /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 모를 섬에서 /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 그런 멍청한 짓이 또 있을까 /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마구 걸었다 (…) 그래서 다짐했다 되도록 오래오래 살자고 / 나이 들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 프랑스 루오 할아버지처럼 / 그렇게'('내가 가장 예뻤을 때' 부분)

소녀 시절 '멍청한 짓'인 전쟁을 겪으며 '가장 예뻤을 때'를 잃어버렸지만, 그의 시는 단순히 상실감이나 분노, 부끄러움 등 부정적인 감정만 담고 있지 않다.

그는 기쁨, 환희 등 모든 감정의 광주리를 안고 자유와 희망이 가득한 곳과 사람들을 절실하게 꿈꾸며 용감하게 한걸음 씩 나아간다.

'그렇게 나는 좋아진다 / 일본의 소소한 마을들이 / 시냇물이 깨끗한 마을 보잘것없는 마을 / 장국이 맛있는 마을 고집스런 마을 / 눈이 푹푹 내리는 마을 유채꽃이 가득한 마을 / 성난 마을 바다가 보이는 마을 / 남자들이 으스대는 마을 여자들이 활기찬 마을'('처음 가는 마을' 부분)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에는 한국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는 다른 일부 일본 지식인들처럼 한국을 분노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자신들의 잘못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다.

한국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에 대한 감정을 최선을 다해 수용해 성숙하게 풀어낸다.

'다쿠보쿠는 1910년 이런 시를 읊었지요 / 일본 지도에 조선국이란 글자 새카맣게 먹으로 / 박박 지워나가며 가을바람 듣는다 / 일찍이 일본어가 밀어내려 했던 이웃나라 말 / 한글 / 어떤 억압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한글 / 용서하십시오(한글) 용서하십시오 / 땀 뻘뻘 흘리며 이번에는 제가 배울 차례입니다'('이웃나라 언어의 숲' 부분)

남편이 세상을 뜬 이듬해인 1976년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윤동주와 신경림 등을 읽으며 한국현대시 번역에 꾸준히 매진했다.

한글과 한국을 접하며 쓴 에세이 '한글로의 여행'을 펴내기도 했다.

그와 시인 홍윤숙이 나눈 우정 또한 시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느 해 깊은 가을 / 우리 집을 찾은 그녀는 / 창밖을 내다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황량한 정원 풍경이 좋네요 / 낙엽을 긁어모으지도 않고 / 꽃은 선 채로 말라 죽었고 /주인으로선 부끄러운 정원이지만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는 손님 취향엔 맞았나보다 /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면서 / 어떻게 지내는지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는데 / 괜히 떳떳치 못한 내 기분을 맞춰주려는 듯 /당신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솔직한 말투 / 산뜻한 자태'('그 사람이 사는 나라' 부분)

bookmania@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9/02/12 10:12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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