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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운동.임정 百주년](22)佛 소도시 쉬프에서도 만세삼창

송고시간2019-01-31 06:00

재불한인 1세대, 1차대전 전후복구로 번 돈 모아 프랑스서 3·1운동 1주년 기념

임정 파리위원부에 자금지원하고 우리 역사·지리 공부도…재발견 노력 '활발'

프랑스 쉬프에서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연 한인 1세대들.[나기호 저 '비바람 몰아쳐도' 수록]

프랑스 쉬프에서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연 한인 1세대들.[나기호 저 '비바람 몰아쳐도' 수록]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1920년 3월 1일 프랑스 중부 마른(Marne) 지방의 소도시 쉬프(Suippes)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과 애국가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시정부가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조직한 파리위원부(대표 김규식) 인사들과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와 유학생들이 연 3·1운동 1주년 경축식이었다.

행사의 주축은 1년 전 프랑스로 들어온 한인 노동자 30여명. 이들은 이역만리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한해 전 조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을 되새기는 뜻깊은 자리를 가진 것이다. 행사 비용은 자신들이 프랑스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을 갹출해 마련했다.

이들은 러시아, 북해, 영국을 거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들어와 1차대전 격전지였던 마른 지방의 전후복구 작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마른의 베르덩 전투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70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냈고, 승전국 프랑스의 대규모 복구사업에는 벨기에·스페인·러시아 등에서 온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여기에 우리 한인들 일부가 참여한 것이다.

이들이 고된 노동으로 번 돈의 상당 부분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활동자금으로 들어갔다. 당시 한인 노동자들이 임정 파리위원부에 6개월간 6천 프랑의 거액을 기부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프랑스의 한인 노동자를 50명으로 가정하면 한 명당 평균 20프랑을 낸 셈인데, 당시 프랑스의 노동자 평균임금을 고려하면 한인들이 한 달 수입의 4분의 1을 파리위원부에 기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연구위원은 논문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 재법한국민회 연구'에서 "이는 당시 국외 어느 지역에 있는 한인들보다 소득대비 독립운동 자금을 많이 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0년 전 한인들의 피땀서린 프랑스 1차대전 전사자 묘
100년 전 한인들의 피땀서린 프랑스 1차대전 전사자 묘

프랑스 쉬프의 1차대전 전사자 묘.
[재불사학자 이장규씨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작년에는 쉬프 지방을 관할하는 마른도청의 먼지 쌓인 자료실에서 당시 한인 노동자들의 명단이 최초로 발견되기도 했다.

재불사학자 이장규(파리 7대 박사과정)씨가 찾아낸 1920년 쉬프시청 외국인 명부에는 박춘화·박단봉·차병식·배영호·박선우 등 한인 37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프랑스 도착 일자, 프랑스 정부에 체류증을 신청한 날짜, 직업 등이 남아있다.

일제 치하에서 외국의 한국인들이 일본이나 중국 국적자로 활동했던 것과 달리 이 명부에는 한인들의 국적이 한국인(Coreen)이라고 명확히 기재된 것이 특징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일제의 침략 이후 이미 소멸한 나라로 받아들여 졌기에 한인 노동자들이 한국 국적으로 프랑스 체류 허가를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평가된다.

한인 노동자들은 어렵게 번 돈을 십시일반 모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활동을 돕는가 하면, 유학생과 지식인 동포들로부터 우리 역사와 지리, 국어를 배우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려 분투했다.

쉬프시청 자료에서는 한인 이도순·백오난 부부가 1921년과 1924년 낳은 '루이'와 '조르제트'라는 이름의 자녀 출생증명서도 발견됐다. 다른 한인 박병서, 박춘화가 증인을 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인들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전후 폐허를 복구하는 고된 삶을 이어가면서도 자녀를 낳아 기르고 가르치던 삶의 흔적이다.

지금도 쉬프에는 홍재하 등 한인 노동자들이 흘린 피땀과 망국의 한, 향수(鄕愁)가 짙게 밴 전사자 묘지가 마른 벌판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당시 한인들의 흔적을 찾는 노력은 프랑스에서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파리 7대 마리오랑주 리베라산 교수 등 한국학자들은 프랑스 내 독립운동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회 '리베르타스'를 조직해 작년 한 해 주목할 만한 성과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최근에는 이 한인 노동자 그룹의 일원이었던 홍재하(1892∼1960)가 파리 근교에서 작고하면서 남긴 다량의 기록물이 세상에 알려졌다.

동포부부 김성영·송은혜 씨의 노력으로 홍재하의 차남(장자크 홍 푸안)이 자택에서 보관해오던 각종 서신, 임시정부 포고령,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을 알린 '독립신문' 호외본 등의 존재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홍재하의 유족은 이 자료 일체를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기로 했다.

yonglae@yna.co.kr

재불독립운동가 홍재하(1960년 파리 근교서 타계)가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를 안고 기뻐하는 모습. 하단에 '아버지와 나 1943년'이라고 적혀 있다. [홍재하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불독립운동가 홍재하(1960년 파리 근교서 타계)가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를 안고 기뻐하는 모습. 하단에 '아버지와 나 1943년'이라고 적혀 있다. [홍재하 차남 장자크 홍 푸안 씨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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