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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이한열 학술제…"군부투입 저지, 6·29 결정적 산파"

"윤동주는 민족연세, 이한열은 민주연세 상징"
제1회 이한열 학술제
제1회 이한열 학술제(서울=연합뉴스) 송은경 수습기자 =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경영관서 제1회 이한열 학술제가 열리고 있다. norae@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이한열의 가장 큰 현실적 기여는 군부 투입 저지였다. 즉 자신을 바쳐 더 많은 유혈을 막은 희생이었다. 그의 피격과 죽음이 공개되자 독재 정권의 폭력행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한열은 한 생명으로서는 사실상 6·29의 가장 결정적인 산파였던 것이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관장인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협동과정 교수는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경영관에서 열린 '제1회 이한열 학술제' 발표에서 이한열의 삶에 이런 의미를 부여했다.

박 교수는 "백주대낮의 살인적인 국가 폭력성은 운동권과 일반 시민 사이의 경계를 일거에 무너뜨렸다"며 "이한열의 피격 이후에야 시민들은 사회적 계몽과 각성을 거쳐 단일대오로 뭉치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한열은 또 다른 수많은 이한열들로 확대 복제되고 있었다"며 이를 '이한열 현상'으로 명명했다.

이한열의 죽음 이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일종의 사회적 계몽과 각성을 겪었고, 여러 사람의 마음이 통해 하나로 연결됐다는 것이 이한열 현상의 요체다.

박 교수는 유관순, 윤동주, 전태일, 박종철, 세월호 희생자 등의 죽음을 언급하며 "한국사회에서 청년 학생들의 희생이 갖는 의미는 늘 당대에 가장 정치 사회적이고 전국적"이라고 강조했다.

가톨릭대에서 현대사를 연구하는 김상숙 박사는 '1987년 6월 항쟁과 이한열'이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이한열의 삶을 당사자의 유고, 문헌 자료, 관련자 인터뷰를 통해 조망했다.

김 박사는 이한열이 '국가폭력의 희생자'라는 수동적인 이미지와 달리 당시 주체적인 청년 학생운동가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한열을 비롯한) 당시 86학번들은 평소 시위 현장에 후배들을 조별로 데리고 다녔으므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위대 선봉에 서기도 했다"며 "1987년 6월 9일에는 이한열이 몸이 아픈데도 (시위대 맨 앞 등에서 경찰 움직임을 파악하는) 사수대로 나갔다는 기록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2세대인 이한열은 이 시기에 조직활동가로서 성실하게 활동했으며 결국 육신 그 자체로 6월 항쟁이 됐다"며 "그와 같은 많은 이한열들의 희생 속에 한국의 민주화가 진행됐다"고 요약했다.

그러면서 "시를 자기 성찰의 도구로 삼았던 이한열의 몇몇 습작 시에서는 역사 앞에서 지식인으로서 고뇌했던 윤동주 시의 정서가 보인다"며 "윤동주는 민족연세, 이한열은 민주연세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날 학술제는 이한열의 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정례화한 최초의 학술제다.

이한열기념사업회와 연세대 이한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함께 주최하며 앞으로 매년 가을 열릴 예정이다.

연세대 경영학과 86학번인 이한열은 전국 22개 도시에서 벌어질 예정이던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하루 앞둔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직격으로 맞아 쓰러졌다.

이를 지켜본 시민이 분노했고 '넥타이 부대'가 조직돼 회사원까지 거리로 나서는 등 이한열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이 전국민적 민주화운동으로 번지게 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한열은 피격 26일 뒤인 7월 5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숨졌다.

jk@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8/11/23 16:4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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