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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서 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11점 발견(종합)

지름 21㎝·무게 17∼18㎏…포 사격하는 포대 유적도 확인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이 묻었을 가능성 커"
고창서 나온 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고창서 나온 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고창=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사적 제346호)에서 조선시대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무더기로 나왔다. 사진은 수혈(竪穴·구덩이) 유적에 묻혔던 비격진천뢰 6점. 2018.11.15

(고창=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시대에 조성한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사적 제346호)에서 조선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무더기로 나왔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은 무장읍성 객사 동쪽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군기고(軍器庫·무기를 두는 창고)로 추정되는 건물터 근처 5.1m 길이 수혈(竪穴·구덩이) 유적과 퇴적토에서 발견한 비격진천뢰 11점을 15일 현장에서 공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작렬(炸裂·산산이 흩어짐) 시한폭탄이라고 할 만한 비격진천뢰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선조(재위 1567∼1608) 연간에 화포장(火砲匠) 이장손이 발명했다고 알려졌다.

무쇠 재질 원형 박 모양으로, 내부에는 화약과 쇳조각, 발화 장치인 죽통(竹筒)을 넣었다.

완구(碗口)라는 화포에 넣어 발사하면 목표 지점에 도착해 일정 시간이 흐른 뒤 천둥·번개와 같은 굉음·섬광을 내면서 터져 수많은 파편을 쏟아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1592) 9월 1일 기사에는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해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는 대목이 있다.

고창서 나온 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고창서 나온 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고창=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시대에 조성한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사적 제346호)에서 조선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무더기로 나왔다. 사진은 수혈(竪穴·구덩이) 유적에 묻혔던 비격진천뢰 6점. 2018.11.15

이번에 나온 비격진천뢰는 지름 21㎝·무게 17∼18㎏으로 크기가 비슷하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그중 한 점의 내부 공간지름은 약 12㎝다.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비격진천뢰는 모두 6점으로, 그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한 점이 보물 제860호로 지정됐다. 다른 비격진천뢰는 창녕 화왕산성, 하동 고하리, 진주성 등에서 나왔는데, 무장읍성처럼 10여 점이 한꺼번에 출토된 사례는 없다.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은 이날 현장 설명회에서 "비격진천뢰 6점은 수혈 유적에서 삼각형 모양으로 나왔고, 나머지 5점은 퇴적토에서 발견했다"며 "폭탄은 모두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보이는데, 수가 많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말했다.

그는 "발굴을 통해 찾은 화왕산성과 진주성 비격진천뢰는 사용하고 남은 탄피라고 보면 되고, 나머지 폭탄도 속이 비었다"며 "무장읍성 비격진천뢰 11점 가운데 2점은 약식 보존처리를 했는데, 내부를 자세히 분석하면 조선시대 화포와 폭탄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때 경주성·진주성·남원성 등지에서 사용됐고, 변이중(1546∼1611)이 화차와 함께 제작해 행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며 "인조 대에 비격진천뢰를 개량해 '비진천뢰'를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고창서 나온 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고창서 나온 조선시대 시한폭탄 '비격진천뢰'(고창=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왼쪽)이 15일 고창 무장읍성에서 정재숙 문화재청장(가장 오른쪽), 유기상 고창군수(오른쪽에서 두 번째)에게 조선시대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설명하고 있다. 2018.11.15

이 실장은 "무장읍성 비격진천뢰를 제작한 시점은 명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구덩이에 폭탄을 모아놨다는 점에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묻은 듯하다"고 덧붙였다.

문헌에 따르면 고종은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이듬해 무장현에 화포군 40명을 배치했고, 1894년 동학농민군이 무장읍성에 입성할 당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며칠간 관군에 위세를 보였다.

이 실장은 "군기고가 불타서 포탄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고의로 묻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비격진천뢰는 조선 후기까지 사용했는데, 동학농민운동 당시 관군이 도망가면서 은닉한 듯하다"고 추정했다.

비격진천뢰가 나온 수혈 인근에서는 포를 쏜 시설로 짐작되는 포대(砲臺) 유적과 방화수를 담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항아리가 발견됐다.

포대 유적은 지름 170㎝·깊이 25㎝인 원형으로, 돌을 깔아 평탄면을 조성한 뒤 흙을 다졌다. 남쪽에서는 포를 거치하기 위해 뚫은 기둥구멍 2개가 드러났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훈련청과 군기고 추정 건물터 유적 10여 동과 도로 시설, 자기, 기와가 출토됐다.

무장읍성은 1417년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길이 1.2㎞ 성으로, 고창군이 2003년 복원정비 계획을 수립한 뒤 연차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각종 건물터와 성벽, 문터, 해자가 확인됐다.

고창 무장읍성 발굴 현장
고창 무장읍성 발굴 현장(고창=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시대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이 나온 고창 무장읍성 발굴 현장. 2018.11.15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8/11/15 15:4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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