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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우리동네] 물 위에 뜬 섬, 육지 안에 섬…영주 무섬마을

350년 넘는 세월 마을과 바깥세상 이어온 `외나무다리' 유명
1666년 반남 박씨 처음 터 잡아…마을 전체가 중요 민속문화재
영주 무섬마을 찾은 관광객
영주 무섬마을 찾은 관광객(영주=연합뉴스) 김준범 기자 = 31일 경북 영주 무섬마을을 찾은 관광객이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 2018.10.31
psykims@yna.co.kr

(영주=연합뉴스) 김효중 기자 = "물 위에 떠 있는 섬, 육지 안에 섬…."

시집올 때 가마 타고 한 번, 죽어서 상여 타고 한 번 지나간다는 애환이 서린 외나무다리가 하나 있다. 무섬마을 얘기다.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이름이다.

소백산맥에서 발원한 내성천(乃城川)이 마을 뒤편에서 서천(영주천)을 만나 350도 정도로 이곳을 휘돌아 나간다.

그 모습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다. 무섬이란 물 수(水), 섬 도(島)로 '수도'리 또는 '물섬'이다.

그러나 물섬은 발음이 어려워 'ㄹ'을 버리고 '무섬'이라고 말한다.

가을에 둘러싸인 무섬마을
가을에 둘러싸인 무섬마을(영주=연합뉴스) 김준범 기자 = 31일 경북 영주 무섬마을이 단풍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2018.10.31
psykims@yna.co.kr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가 1666년이다. 반남(潘南) 박씨가 마을에 처음 터를 잡고부터다.

그 뒤 선성(宣城) 김씨가 들어와 박씨 문중과 혼인해 두 집안이 오래도록 세월을 함께 보낸 셈이다.

지금도 두 성씨가 주를 이뤄 수백 년 역사와 전통을 잇고 있다.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이고 많은 고택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본거지이기도 했다. 일제 눈을 피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 장소로 적합해서다.

무섬마을 전경 [영주시 제공]
무섬마을 전경 [영주시 제공]

◇ 육지 안 섬…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서로 안고 휘감아 돌아

무섬은 태백산 줄기인 안동 학가산(鶴駕山) 끝자락에 있다.

동쪽 일부를 빼면 삼면이 온통 내성천 물길에 휘감겨있다. 안동 하회마을, 예천 회룡포처럼 '물돌이' 마을이다.

동네 앞을 돌아 나가는 물은 맑고 잔잔하다. 산과 물이 태극 모양으로 서로 안고 휘감아 돌아 산수가 절경을 이룬다.

하얀 모래밭이 마을을 빙 둘러 감싸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예부터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연화부수(蓮花浮水) 또는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매화낙지(梅花落地)로 길지 가운데 길지로 꼽았다.

마을 동쪽 500여m에서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西川)이 합류한다.

이어 마을 전체를 한 바퀴 휘감아 흐르며 건너편 아홉 골짜기 물을 흡수해서 구수도회(九水到廻)라고 했다.

무섬 옛 지명은 '섬계'(剡溪)다. 마을이 중국 안도라는 선비가 살던 섬계와 비슷해서다. 섬(剡)은 고을 이름 섬 자인데 염이라고도 발음한다. 계(溪)는 시내를 뜻하고 물가에 가깝게 있는 동네를 말한다.

논밭을 만들 공간은 넉넉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은 강을 건너 12㎞를 걸어서 농사를 지으러 다녔다.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을 정비하며 이름을 바꿨다.

마을 앞 내성천에는 2만6천㎡가 넘는 모래사장이 있다.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영주시 제공]

◇ 300년 넘는 세월 유일한 통로 외나무다리…떠내려가면 또 올리고

무섬마을에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있다. 시집올 때 가마 타고 한 번, 죽어서 상여 타고 한 번 지나간다는 애환이 서린 것이다. 마을과 강 건너를 이은 외나무다리다.

동네에 들어서려면 길이 150m에 폭 30㎝인 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것도 다리 폭이 좁아 긴 장대에 의지한 채 말이다.

따라서 어느 사람도 쉽게 마을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무섬마을에 시집오면 죽어서야 상여를 타고 나갈 수 있다"는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장마철에는 내성천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 해마다 다리를 새로 놓아야 했다. 물길에 순응하게 뱀이 움직이는 모양처럼 다리를 만들었다.

1983년 콘크리트 다리인 수도교를 놓을 때까지 300년 넘게 바깥세상을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

마을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보따리장수나 다른 곳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이기도 했다.

수도교 건설로 사라진 외나무다리를 최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원래 마을에서 밖으로 나가는 다리는 세 곳에 있었다. 영주로 가는 외나무다리인데 '뒷다리'(영주시장 갈 때 이용)다.

지금 수도교 쪽에 있던 다리는 학교 갈 때 건너는 길이었다.

현재 박종우 씨 집 앞쪽에 난 다리는 들에 일하러 갈 때 주로 이용했고 '놀기미다리'라 한다. '놀기미논'으로 가는 다리다는 뜻이다.

이 외나무다리 중간마다 마주 오는 이를 피해갈 여분의 짧은 다리인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마주 보고 건너던 사람들은 비껴다리에서 서로 길을 양보했다.

그때는 외지인이 섣불리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빠질 때도 잦았다. 이에 어른들은 무섬을 드나들 때 마음 수양을 하고 다리를 건너야 한다고 했단다.

해마다 10월에는 외나무다리 축제가 열린다.

외나무다리 행렬 재연, 전통 상여 재연, 무섬마을 할아버지와 야행(夜行), 전통 한복 입고 무섬마을 나들이와 같은 행사를 한다,

영주시에 따르면 지난달 12일부터 이틀 동안 열린 축제에는 관광객 8천132명이 찾았다.

올해 들어 9월까지 무섬마을에는 29만8천814명이 왔다. 지난해 관광객은 45만3천127명에 이른다.

무섬마을 상여 행렬
무섬마을 상여 행렬[영주시청 제공=연합뉴스]

◇ 전통마을 전체가 문화재…100년 넘는 집 16채, 문화재 지정 집 9채

무섬마을은 원래 행정구역 이름은 영주시(榮州市) 문수면(文殊面) 수도리(水島里)이다.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문화재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이다.

국가가 마을 중요성을 인정해 2013년 8월 23일 중요민속문화재 제278호로 지정했다.

또 만죽재(晩竹齋), 해우당(海愚堂)을 비롯해 지정문화재가 10곳이다. 100년이 넘는 고택도 많이 남아 조상 자취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무섬마을 입향시조는 박수(朴檖 1641∼1709)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문중(文仲)이며 충의위이다.

그 뒤 선성(宣城) 김씨가 들어와 박씨와 같이 동족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김씨 입향시조는 김대(金臺 1732∼1809)이다.

처가 마을에 자리 잡은 김대는 자가 자준(子俊), 호는 치류정(峙流亭)이다.

그는 박수 증손녀와 결혼해 처가인 이곳에 들어와 선성 김씨 입향조가 되었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가 두 집안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만죽재, 해우당 고택을 비롯해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口자형 가옥, 까치구멍집, 겹집, 남부지방 민가 등은 다양한 형태인 구조와 양식으로 전통주거·민속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섬 역사는 옛집이 증명한다. 100년이 넘은 집이 16채, 문화재로 지정한 집이 9채(민속자료 4채, 문화재자료 5채)이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3호 만죽재 고택 [영주시 제공]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3호 만죽재 고택 [영주시 제공]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만죽재이다. 반남 박씨 종가인 만죽재는 경북 북부 양반집 구조 전형을 띠고 있다.

만죽재 고택은 박수가 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1666년에 건립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 안채와 '一 자형' 사랑채가 '口자형'을 이룬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 해우당 고택 [영주시 제공]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 해우당 고택 [영주시 제공]

해우당 고택은 1876년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지낸 해우당(海愚堂) 김낙풍(1825∼1900)이 지었다고 한다.

이 집은 내성천에 놓인 수도교를 건너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口자형'이다.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아도서숙(亞島書塾)은 이 마을에서 이름을 빛낸 애국지사들 활동 거점이었다. '아도'는 아세아 조선반도 내 수도리를 줄인 말이고 '서숙'은 옛날 서당을 가리킨다.

김화진 주도로 1928년 10월 문을 열어 1933년 일제가 강제로 폐쇄할 때까지 무섬마을 교육기관이자 항일운동 거점 역할을 했다.

아도서숙은 김성규, 김용한, 김광진, 김계진 등 운영위원을 선출해 문맹 퇴치, 민족교육, 민족정신 고양 등을 주요 사업으로 농민계몽활동과 독립운동을 동시에 펼쳤다.

이들은 일제 감시와 탄압으로 검거와 투옥을 되풀이하고도 끝까지 영주 독립운동 구심체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아도서숙은 아쉽게도 원래 건물은 없어졌고 2014년 새로 복원했다.

경북 영양 주실 마을 출신인 동탁 조지훈이 무섬마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9년 이곳으로 장가를 오면서부터다.

혜화전문학교 시절 무섬 출신 김난희(金蘭姬)와 결혼한 그는 방학마다 내려와 시심(詩心)을 일구었다.

처가 앞 모래밭을 한없이 거닐며 동탁은 시정(詩情)을 마음껏 펼쳤다. 시 곳곳에 '띠잇강변', '겨먹이' 등 무섬마을과 관련 있는 시어와 일화를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처가 마을 경치에 반해 이곳을 무대로 쓴 시 '별리'가 유명하다.

무섬마을은 한때 120여 가구에 주민 500여명이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50여 가구에 100여명만 사는 작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한다.

이곳 문화관광 해설사 박미예(54)씨는 "무섬마을은 수백 년 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며 "나라가 어려울 때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했고 문맹 퇴치 운동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kimhj@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8/11/10 11: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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