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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전 국내 화교요릿집이 일본의 두 배였던 이유

송고시간2018-10-26 06:30

이정희 교수 '한반도 화교사'·'화교가 없는 나라' 출간

인천 차이나타운. [연합뉴스 자료사진]

인천 차이나타운.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화교가 차린 중화요리점은 1930년 2천274개에 달했다. 수도권에 534개가 있었고, 함경남도·평안남도·황해도 순으로 화교요릿집이 많았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당시에 화교가 경영하는 중화요리점이 조선의 절반 수준인 1천388개에 불과했다. 화교가 많이 거주한 요코하마와 고베에서도 화교 음식점은 10개에 미치지 못했다.

20년 동안 화교사를 연구한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는 2012년 일본 교토대 출판사에서 펴낸 '조선화교와 근대 동아시아'에 이후 진행한 연구 성과로 살을 붙여 내놓은 신간 '한반도 화교사'에서 "화교 인구 증가와 화교 상업 발전이 국내 중화요리점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1930년 인구 통계를 보면 조선화교가 9만1천783명인 데 반해 일본화교는 3만9천400명이었다. 화교 인구 자체에서 두 배가 넘는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본 정부는 중국 출신 단순 육체노동자의 입국을 근본적으로 제한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고려해 화공(華工·화교 노동자)을 철저히 막지 않았다"며 "특히 화교 직물 상점은 조선에서 판매총액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상권을 형성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기름진 중국 음식이 일본인 입맛에 잘 맞지 않았다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화교 중화요리점이 조선에서 대중화에 성공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일본에서는 화교 중화요리점이 대체로 대도시 주변에 위치하고, 고급 음식점이 다수를 차지했다"면서 "조선에서는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호떡집이 농촌까지 퍼졌다"고 주장한다.

중화요리점에 관한 이야기는 1880년대부터 해방 전까지 한반도 화교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한 이 책에서 극히 일부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직물상, 삼도업(三刀業·음식점, 이발소, 양복점), 제조업, 농업, 공업이라는 다섯 가지 측면에서 화교사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그는 근대에 화교가 꾸준히 증가한 원인을 조선의 끌어당김, 중국의 밀어내기, 연쇄 이주라는 세 가지 틀로 분석한다.

즉 조선에서는 직물·채소·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화교가 떠나온 산둥성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여기에 한반도에 정착한 화교들이 친척과 친구를 불러오면서 화교 인구가 더욱 많아졌다.

저자는 중국인의 조선 이주를 동아시아 역내 상품과 화폐, 정보 이동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화교 유입은 조선인의 일본 이주 증가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일본화교는 상인 중심, 대만화교는 노동자 중심이지만, 조선화교는 동남아시아 화교처럼 상인·노동자·농민을 모두 갖췄다는 특징이 있었다고 정리한다.

저자는 학술서인 '한반도 화교사'와 함께 '화교가 없는 나라'라는 대중서도 발간했다. '신(新)화교'라고 할 만한 영등포구 대림동 거주 조선족, 화교학교의 교육 흐름, 북한화교에 대한 내용을 추가했다.

특히 한국화교의 처지가 재일동포보다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화교가 내뱉은 '나라 없는 난민'이라는 표현을 소개한다.

저자는 "한반도에 뿌리내린 화교는 다른 지역 화교와 비교하면 중층적이고 복잡한 특성을 지닌다"며 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힘겨운 외줄 타기를 하는 한국화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동아시아. 한반도 화교사 760쪽, 2만8천원. 화교가 없는 나라 240쪽, 1만5천원.

90년전 국내 화교요릿집이 일본의 두 배였던 이유 - 2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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