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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우리동네] 과거 딛고 근현대유산으로…'부산 우암동 189번지'

일제강점기 소 막사, 6·25 피란민 주거지서 등록문화재로
피란 시기 주거사 이해 중요한 자료로 평가

(부산=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 "부산시 남구 우암동 189번지. 주소는 영도구 청학3동 대림빌라 4동 1109홉니다."

2001년 부산 출신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에서 살인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선 준석(유오성)이 본적과 주소를 묻는 판사에게 한 대답이다.

이 영화 대사에 나오는 '우암동 189번지'는 허구가 아니다.

영화 속 주소는 곽 감독의 아버지이자 실향민인 곽인완 씨가 부산으로 피란해 처음 살았던 곳이다.

1920년대 부산 남구 '우암동 189번지'
1920년대 부산 남구 '우암동 189번지'[농림축산검역본부 제공]

우암동 189번지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전국에서 공출한 소를 검역하던 시설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역검역소'와 '소(牛) 막사'로 불리던 이 시설은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이 살았고, 그 이후에는 가난한 도시 노동자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문화재청은 올해 5월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 식민지 조선의 소는 모두 여기로

우암동(牛岩洞)의 역사는 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구에 있던 큰 바위의 모양이 소처럼 생겼다고 해서 동네 이름이 우암동이 됐다.

이런 우암동은 일제가 1909년에 우역검역소와 소 막사를 설치하면서 수탈의 전진 기지로 변한다. 총책임자는 일본인으로 현재의 장·차관급이었다.

부산남구민속회가 2001년에 발간한 '남구의 민속과 문화'를 보면 일제는 우리나라의 소를 모아 군용으로 만주나 일본에 보내려고 부산 우암동과 함경북도 청진에 우역검역소와 소 막사를 뒀다.

1937년 부산 남구 '우암동 189번지'
1937년 부산 남구 '우암동 189번지'[농림축산검역본부 제공]

소 막사는 전국에서 모은 소를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임시로 보관·관리하는 곳이었다.

모두 20개의 막사로 이뤄져 있었는데 한 개의 막사는 2칸으로 나뉘어 각각 소 60마리를 보관했다.

검역을 마친 소는 기차에 실려 만주로 가거나 배에 실려 일본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1909년 부산 우암동 해안가 소 선적
1909년 부산 우암동 해안가 소 선적[FP홀딩스 김태영 씨 제공]

부산에서는 두 척의 배가 1년에 1만2천마리 정도의 소를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대개 6년생 이하의 건강한 소가 공출의 대상이었다.

문제가 있거나 병든 소는 일 년에 15마리 정도였다. 이런 소는 화장터에서 태워버렸고 화장터 굴뚝의 높이는 현재 목욕탕 굴뚝의 높이와 비슷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의 소는 1945년 해방 전까지 일본과 만주로 향했다.

◇ 소가 머물던 곳은 피란민 차지

해방 전까지 우암동에는 사람이 사는 집이 거의 없었다. 우역검역소와 소 막사에는 말과 소만 살았다.

해방과 더불어 일본에서 돌아온 동포들이 우암동에서 작은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소 막사를 개조해 임시로 살 수 있는 집으로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1·4후퇴 이후에도 많은 피란민이 몰려들어 천막이나 판잣집을 만들거나 소 막사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우암동의 인구가 급증한다.

그 결과 주거지가 무질서하게 들어서면서 좁은 골목길이 형성됐고, 오늘날 우암동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6·25 당시 부산 우암동 피란민촌 어린이(서전병원 사진전 출품작)
6·25 당시 부산 우암동 피란민촌 어린이(서전병원 사진전 출품작)[부산시 제공]

부산에 터를 잡은 피란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당시 소 막사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몇십 명이 함께 지냈다.

소 막사 1개동에 평균 100명 이상이 생활했고, 보자기로 칸을 나누고 가마니를 이불 삼아 하루하루를 버텼다.

전기가 없어 밤이면 암흑천지였다. 여름이면 밤새 모기에 시달렸고 겨울에는 뼛속까지 칼바람이 파고들었다.

실향민이나 피란민들은 먹고살려고 온종일 일하고 녹초가 돼 숙소에 돌아와서도 `내일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힘들 시절을 보낸 뒤 상당수는 우암동을 떠나고 일부는 그대로 남았다.

이처럼 일제 수탈의 아픔과 피란민의 애환을 간직한 우암동은 아직도 공동화장실이 존재하는 등 주거환경 개선이 필요한 낙후된 마을로 남아있다.

◇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바뀌는 우암동…'등록문화재' 지정

부산시는 내년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에 걸친 근대 유산인 소막마을을 복원하기 위해 문화재청의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 공모사업에 신청할 예정이다.

부산시는 문화재청 공모사업에 선정되면 5년간 매년 20억∼50억원의 국비를 지원받아 소막마을 복원에 나선다.

전체 사업예산은 200억원으로 소 막사의 원형을 복원하고 일제강점기 소막마을과 피란 시절 생활용품 등을 전시하는 소규모 박물관을 조성한다.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인 소막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다크 투어 관광구역'도 만들어 피란수도 문화유산과 연결하는 관광코스로 활용할 계획이다.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과 연계해 우암시장 등 우암동 소막마을 일대 슬럼화한 마을 기반시설을 새로 정비한다.

이 밖에 관할 남구청과 함께 문화복합형 주거환경관리사업으로 마을 중심길 등을 정비하고 새뜰마을 사업으로 경로당, 가로시설, 하수시설 등을 설치한다.

현재 우암동 189번지에는 소 막사 건물 중 1개만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나머지 20여개 건물에는 소 막사의 환기구 정도만 남아있다.

소 막사에서 주택된 100년전 건물, 문화재 등록
소 막사에서 주택된 100년전 건물, 문화재 등록[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올해 5월 소 막사의 원형을 유지한 건물인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을 등록문화재 제715호로 지정했다.

1층 짜리 건물인 이 주택은 나무와 흙, 벽돌, 콘크리트 블록으로 축조했으며, 연면적은 320.5㎡다.

현지 조사에 참여한 전문가는 보고서에서 "거주시설로 사용하면서 복도 상부에 설치한 환기구를 다락방 창문으로 쓰는 등 다양한 변형이 일어났다"며 "1960년대에는 25가구 내외 100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어 "주거시설이 문화재로 등록되는 경우는 많지만, 소막마을 주택은 역사가 기존 사례와 다르다"며 "피란 시기 주거사(住居史)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pitbull@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1/08/14 16:38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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