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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로 살피는 조선시대 여성과 무인의 위상

송고시간2018-07-20 18:39

신간 '조선 여성의 삶'·'조선 무인의 역사'

역사서로 살피는 조선시대 여성과 무인의 위상 - 1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시대에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고, 무인은 문인과 비교하면 입지가 매우 좁았다.

신간 '법과 풍속으로 본 조선 여성의 삶'과 '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은 다양한 사료로 조선 여성과 무인의 위상을 분석한 책이다.

1980년대부터 여성사를 연구한 장병인 충남대 명예교수가 쓴 '법과 풍속으로 본 조선 여성의 삶'은 혼인과 이혼이 이뤄진 방식, 간통과 강간에 따른 처벌을 소개한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조혼(早婚) 풍습은 조선의 악습으로 인식됐지만, 실제로 조선 여성이 혼인한 나이는 전통사회치고 그리 적지 않았다. 17세기 무렵 여성은 보통 17세에 결혼했는데, 당시 중국에서도 여성 초혼 연령은 대략 16∼19세였다.

저자는 동성동본 혼인 금지에 관한 고정관념도 깨트린다. 그는 17∼19세기 호적을 보면 동성혼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동성동본혼도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다만 동성동본혼을 하는 계층은 양반보다는 상민과 천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혼 절차는 여성에게 분명히 불리했다. 조선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은 명나라 법률서인 '대명률'(大明律)에 있는 "부부가 화합하지 못해 서로 이혼하기를 원할 때는 받아들인다"는 조항을 적용하도록 했지만, 합의 이혼은 거의 없었다.

아내를 내쫓는 일곱 가지 이유인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 그중에 간통·악질·불효로 인한 이혼은 가능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한 무자(無子)를 비롯해 질투·다언(多言)·절도는 이혼 사유가 되지 않았다.

간통을 저지른 남녀에 대한 처벌도 표면적으로는 쌍벌주의를 표방했으나, 여성이 더 무거운 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조선시대에는 후기로 갈수록 성에 대한 규제가 강화됐다"며 "성에 대한 규제는 직접적으로는 처벌 규정 강화로, 간접적으로는 정절 이데올로기 강화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저자는 성적 규제 강화 원인을 성리학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조선 후기에 체제 위기에 봉착한 지배계급이 바닥으로 떨어진 자신들의 위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방안으로 성적 규제를 강화한 듯하다"고 주장한다.

'조선 무인의 역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0년 이후 무과 응시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합격자도 양산한 현상을 피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자본'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한다. 문화자본은 문화가 지닌 화폐적 가치로, 사회적으로 형성된 계급 배경에 의해 결정된다.

저자인 유진 Y. 박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조선시대 무과 급제자의 20%에 달하는 3만2천여 명에 관한 정보를 분석하는 한편, 당대 서민문화가 반영된 소설도 들여다본다.

통계적으로 무과가 생긴 1402년부터 1591년까지 무과 급제자는 7천758명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607년까지는 2만∼4만 명이 합격했고, 1608년부터 무과가 폐지된 1894년 사이에는 12만1천623명이 급제했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이후 큰 전쟁을 겪지 않은 조선에서 무과 급제자가 이렇게 많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체제를 유지하면서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 욕구를 채워주려다 보니 나타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는 "무과에 지원하는 이들이 다양한 무술 기능을 갖추는 것은 실질적으로 문화자본이 체화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국가는 무과 급제로 수여하는 직위와 무과 제도를 피지배층 사이에서 잠재적 체제 전복적 요소들이 봉기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망으로 사용했다"고 강조한다.

법과 풍속으로 본 조선 여성의 삶 = 휴머니스트. 400쪽. 2만2천원.

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 = 푸른역사. 유현재 옮김. 304쪽. 2만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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