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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우리동네] 고무신서 나이키까지…신발산업 100년

세계에 이름 떨친 한국 신발 부산서 힘찬 재도약

(부산=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 "1년 만기 100만 원을 찾아 집으로 보내드리자 아버지께서 편지를 보내셨다. 이 못난 아버지 용서해달라고, 자식이 객지에서 고생하면서 모은 돈을 부모 도리 못 하고 쓰면 큰 죄가 된다며 가치 있게 쓰시겠다던 아버지의 서신,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제주도가 고향인 정모 씨가 1985년 2월 26일 부산의 한 신발회사에 입사해 겪은 일을 정리해 공모전에 낸 수기의 일부분이다.

다리가 불편해 늘 술만 마시며 "여자가 공부하면 뭘 하냐"던 아버지는 정 씨가 부산에서 돈을 보내자 술은 멀리하고 집 뒷산에 밀감나무를 심었다.

1980년대 부산 삼화고무 작업장
1980년대 부산 삼화고무 작업장[동길산 시인 제공=연합뉴스]

그 시절 정 씨와 같은 수많은 사람이 부산의 신발회사에서 청춘을 불태우며 돈을 벌어 가장 노릇을 했다.

이들의 피와 땀은 부산에서 만든 신발이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을 얻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 당시 국내 7대 신발 대기업이 부산에 있었기에 부산은 한국 신발의 고향이자 요람이라고 평가받는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서울의 고무신 공장에서 시작돼 내년 100년을 맞는 우리나라 신발산업은 그동안 부산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다.

◇ 고무신 생산의 저력, '보따리상 나이키'를 만나다

신발은 삼국시대에도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있었지만, 근대 제조업으로서 신발산업의 시작은 고무신이라고 할 수 있다.

고무신의 생산은 고무나무에서 추출한 생고무에 황을 더하고 가열해서 신발 재료를 만드는 '가황(加黃) 기법'이 1839년 미국에서 개발되면서 본격화했다.

가황 기법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고무신 공장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1919년 8월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에 우리나라의 첫 고무신 공장인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창업자 이하영은 부산 기장 출신이었다. 그는 일본산 고무신의 품귀 현상에 주목해 국내 신발공장 설립을 모색했다.

조선총독부가 3·1 독립운동을 기점으로 유화정책을 펴면서 부산 등 전국에 신발공장이 잇따라 설립됐다.

고무신의 판매 규모는 1921년 한해에만 80만8천 켤레였다. 이중 70만 켤레는 일본에서, 국내 생산은 10만8천켤레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0년 한국전쟁은 부산을 국내 신발산업의 중심지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피란수도 부산에 피란민을 비롯해 물자와 설비가 몰려들었다. 피란민은 노동집약형인 신발산업에 풍부한 노동력이면서 안정적인 수요층이었다.

고무신을 만들던 부산의 신발공장은 군화 등을 납품하면서 사업 기반을 다져나갔다.

1960년대에는 발을 덮는 갑피와 발바닥이 닿은 창으로 구성된 새로운 신발이 등장해 고무신과 세대교체가 진행됐다.

1970년대 생활 수준이 나아지면서 신발 주력제품은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바뀐다.

부산을 중심으로 성장한 국내 신발산업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의 기술과 생산설비가 유입되면서 한 단계 도약하고 베트남 전쟁과 맞물려 급격하게 성장한다.

삼화고무 방문 나이키 임원과 기념촬영
삼화고무 방문 나이키 임원과 기념촬영[동길산 시인 제공=연합뉴스]

1974년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2동에 있던 삼화고무는 미국의 나이키와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생산 첫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을 앞두고 나이키의 창업자 필 나이트가 송승호 전 삼화고무 수출담당이사(당시 수출부장)를 찾아올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나이키는 저가의 일본 러닝화를 미국으로 수입해 팔던 보따리상이었다. 나이키의 사업 첫해 매출은 800달러에 불과할 정도였다.

삼화고무와 계약한 나이키의 첫 주문량은 운동화 3천켤레였는데 이후 수만켤레 이상으로 급격하게 늘어나 오늘날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나이키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나이키와 삼화고무는 5년 독점계약을 체결했고 이후 국제상사와 동양고무 등도 나이키 운동화를 만들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브랜드로 거듭난 나이키의 성장 배경에 우수한 노동력, 저임금, 엄격한 생산관리 등의 강점을 내세운 우리나라 신발회사들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나이키와의 계약을 계기로 세계 각국의 바이어들은 부산으로 몰렸다.

◇ 부산을 먹여 살린 신발, 지역 경제가 '들썩'

1970년∼1980년대 부산에서 신발산업의 고용인구는 5만명 이상이었다. 종업원이 1만명이 넘는 신발회사는 4곳이었다.

출퇴근 시간 부산의 주요 신발회사 앞은 직원들의 행렬로 인산인해였다. 경남 거제와 울산의 '빅3 조선소' 앞의 출퇴근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방송에선 신발 광고가 쉴 새 없이 나왔고 도로 위에선 언제나 신발회사 통근버스가 오갔다.

부산신발큰잔치 신발아가씨 선발 장면
부산신발큰잔치 신발아가씨 선발 장면[동길산 시인 제공=연합뉴스]

신발공장이나 섬유공장 주변에는 극장이 있었고, 월급날에 맞춰 새 영화를 선보였다.

종이봉투에 현금으로 월급을 받던 시절이라 월급날이 되면 신발공장 출입문 앞에는 외상 술값을 받으러 식당이나 주점 주인들이 찾아왔고 그 일대는 난전 상인들이 몰렸다.

신발공장이 있던 부산진구 가야동, 개금동, 당감동에는 금은방이 성업했다.

베이비부머가 대부분이던 신발공장의 직원들이 혼기에 접어든 시기라 금은방에서 결혼반지나 돌 반지가 잘 팔렸다.

자취방이나 하숙집도 성행하는 등 신발회사 직원들이 썼던 생활비는 부산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삼화고무에서 근무한 경험과 자료 조사 등을 토대로 최근 부산진문화원과 책 '고무신에서 나이키까지-부산진구 신발이야기'를 펴낸 동길산(57) 시인은 "신발공장이 부산지역 경제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며 "세 집 건너 한 집이 '신발 밥'을 먹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신발회사는 학교도 설립했다. 삼화고무 부설 삼화여상은 3년간 공납금을 면제하고 희망자 전원에게 현대식 기숙사를 무료로 제공했다.

이런 학교의 졸업식장은 늘 눈물바다가 됐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 힘들게 얻은 졸업장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신발회사 부설 여상에 다녔던 한 주부는 "깨끗한 교복 입고 자연광선 아래서 수업하는 '주간 학생'은 우리의 애환을 모른다"며 "뽀얀 작업복 입고 형광등 아래에서 구슬땀 흘리며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던 그 시절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 최대의 시련과 업계 줄도산…OEM의 한계

국내 신발산업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큰 시련을 겪었다.

불안정한 주문으로 인한 수출 부진, 가파른 원화 절상, 제조비 상승 등에 따른 원가 압박 등의 영향으로 채산성이 급격하게 악화한 것이다.

1990년대 기준으로 노무비가 제조원가의 25∼30%를 차지했다.

1992년 9월 도산 이후 삼화고무 외부 모습
1992년 9월 도산 이후 삼화고무 외부 모습[부산상의 제공=연합뉴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했지만, 전체 수출의 95%가 자사 브랜드 제품이 아닌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OEM)이었다.

독자 브랜드로 경쟁하는 게 아닌 OEM 생산 방식은 당장 많은 돈을 벌게 해줬지만, 나이키나 리복 등 외국 업체가 이른바 `갑이'었기 때문에 거래계약이 해지되면 모든 게 끝나는 함정과도 같았다.

노사분규까지 더해지면서 신발산업의 중심에 있던 부산은 고스란히 직격탄을 맞았다.

삼화고무, 진양화학, 태화고무, 대양고무 등 쟁쟁하던 회사가 도산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까지 수출 실적 선두를 지키던 삼화고무는 수출주문 감소와 자금난 탓에 1992년 9월 신발회사 가운데 제일 먼저 도산했다.

진양화학은 최대 신발 수입국이던 미국이 한국의 신발 수입제한 조치를 발동하면서 경영 위기를 맞아 1983년에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후 경영 합리화 과정과 구조조정 등을 거쳐 1992년에 신발 생산을 완전히 중단했다.

1989년 기준 연 매출이 1천245억원이던 태화고무도 1991년에 나이키가 거래를 중단하면서 경영난이 심각해져 1994년에 신발 생산을 중단했다.

신발회사가 있던 곳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파트 등이 들어서 대부분이 그 자취를 감췄고,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부산의 신발회사에서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은 당시 회사에서 늘 듣던 이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인류가 신발을 신고 다니는 한 신발사업은 망하지 않는다."

◇ 새로운 도약 준비하는 '황금신발'

과거 신발산업 중심지 부산진구에 신발 조형물
과거 신발산업 중심지 부산진구에 신발 조형물[부산진구청 제공=연합뉴스]

고무신에서 시작한 국내 신발산업은 침체기를 이겨내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트렉스타, RYN 코리아, 비트로, 이너스 코리아 등이 세계 시장에 진출해있다.

한국무역협회 등의 자료를 보면 2016년 기준으로 국내 신발 제조업체는 493개사로 종사자는 1만1천538명이다. 수출 규모는 4억8천500만 달러다.

부산에만 국내의 절반가량인 230개 업체가 있고, 종사자는 5천864명이다.

국내의 신발 수출실적은 2009년 이후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도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다가 최근에는 유럽발 세계 경기침체 등의 영향으로 수출이 급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산의 신발 수출은 2015년 이후 꾸준한 상승세다. 2017년 수출액은 2억1천6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4.3% 증가했다.

부산시와 관련 기관은 신발 공정 자동화와 스마트공장 구축 지원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부산시와 부산경제진흥원 신발산업진흥센터는 '부산브랜드 신발 육성사업'의 하나로 해마다 부산지역 신발업체 5개사를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젊은 아이디어로 창업한 스타트업 4개사를 추가해 지역 신발업체 9개사를 선정하고 기술개발 및 사업화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차세대 신발산업을 이끌 대학생들의 활약도 눈에 띈다.

2017년에는 '제비'(swallow)를 모티브로 동의대 산업디자인학과 김원우 씨가 디자인하고 지역업체인 지패션코리아가 제품으로 만든 '스왈로우' 2천400켤레가 출시 한 달 만에 완판되기도 했다.

부산경제진흥원이 '신발디자이너 양성사업' 프로젝트로 추진한 결과였다.

같은 해 6월 신라대 김현지 씨가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2017 국제신발디자인경진대회(IFDC)'에 출품한 아동화 디자인이 동상을 받았다.

한국신발관
한국신발관 [부산시 제공=연합뉴스]

지난 2월 부산시 부산진구 개금동에 '한국신발관'(K-Shoes Center)이 개관했다.

한국신발관은 중소기업의 글로벌 마케팅을 돕고 국내 신발산업의 태동지인 부산과 한국의 신발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용지 2천644㎡, 건물면적 4천141㎡에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로 119억 원을 투입해 신발멀티홍보관, 역사전시관, 비즈니스관, 인력양성관 등을 갖췄다.

한국신발협회 회장을 맡은 태광실업은 한국신발관 개관을 기념해 신발산업 육성기금 1억원을 기탁했다.

안광우 부산경제진흥원 신발산업진흥센터장은 "한국신발관은 국비와 시비를 들여 설립한 전국 유일의 신발산업 지원 거점 시설"이라며 "공격적인 글로벌 마케팅을 벌여 국내 신발산업이 70∼80년대 호황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신발산업협회 회장을 지낸 권동칠 트렉스타 회장은 "국내 신발산업은 최근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해외에 생산시설을 둔 신발 대기업은 연 매출이 1조원을 넘어섰고, 국내 생산업체는 자동화를 통한 생산원가 절감에 매진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pitbull@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8/11/16 17: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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