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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수렴청정한 대비 권한, 왕권 능가하지 못해"

임혜련 교수, 대비 역할 규정한 '수렴청정절목' 분석
고종이 수렴청정한 조대비를 위해 지었다는 경복궁 자경전. 고종 25년(1888) 재건됐다. [문화재청 제공]
고종이 수렴청정한 조대비를 위해 지었다는 경복궁 자경전. 고종 25년(1888) 재건됐다.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시대에는 나이가 어린 국왕이 즉위했을 때 왕실의 웃어른인 대비가 국정을 운영하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재위 1469∼1494)이 왕위에 올랐을 때 세조 비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한 것을 시작으로 명종, 선조를 거쳐 19세기 들어서는 순조(재위 1800∼1834)부터 새로운 왕이 나올 때마다 수렴청정이 이뤄졌다.

15일 학계에 따르면 조선시대 왕실 여성사를 연구해온 임혜련 숙명여대 연구교수는 학술지 '역사와 담론'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 '조선 후기 대리정치의 권한 범주와 왕권'에서 19세기 완성된 수렴청정 규정인 '수렴청정절목'(垂簾聽政節目)을 분석했다.

임 교수는 수렴청정절목 제정에 대해 "선조대 이래 200년이 지나 수렴청정이 다시 행해지면서 그사이 대리청정(代理聽政·세자, 세제, 세손이 왕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는 행위)의 시행과 절목 제정의 영향을 받아 (수렴청정이) 제도적으로 완비된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순조가 즉위할 무렵 예조가 마련한 수렴청정절목은 중국 송나라 선인태후와 조선 정희왕후의 예를 따라 만들어졌다. 정사 처리와 방법, 대비의 위상 규정 등에 관한 내용을 담은 12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절목에 따르면 수렴청정을 할 때는 왕과 대비가 국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에서 정사를 봤다. 왕과 대비가 현안에 대한 보고를 함께 들은 뒤에는 왕이 직접 결재하기도 하고, 대비가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 왕이 대비에게 뜻을 묻고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궁궐의 경비와 호위에 관한 사안은 왕이 보고를 받고 대비의 명을 받아 지시를 내렸으나, 신하들이 올리는 상소나 장계는 왕이 직접 결재하기도 했다.

임 교수는 "수렴청정절목에 국왕과 대비의 업무는 구분돼 있지 않다"며 "왕의 권한이 대비에게 위임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권한을 공유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신하들이 대부분 왕에게 먼저 보고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대비는 왕이 요청한 사안에 대해 뜻을 밝혔고, 이후 국왕이 결재했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이어 "왕과 대비가 내리는 하교는 명칭이 동일했고, 모두 자신을 '여'(予)라고 칭했다. 물건을 바치는 공상을 할 때도 왕과 대비가 같았다"며 두 사람의 위상이 같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비는 구조적으로 왕이 될 수 없었다. 여성인 대비는 왕을 대체하거나 왕권을 침해할 우려가 없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왕권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임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대비는 선왕의 왕비로서 왕조를 계승하고 국가를 성장시킨 내조의 공이 있다는 역할론에 기인해 수렴청정을 했다"며 "하지만 수렴청정 시기에도 대비의 권한은 왕권을 능가하지 못했고, 오히려 어린 국왕의 위상을 성장시키는 기능을 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임 교수는 수렴청정절목이라는 규정과 실제 적용 사례는 다를 수 있다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8/04/15 11:3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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