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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입소문 두려워"…아직도 말 못하는 성폭력 피해자들

송고시간2018-04-10 07:15

강원 모 의료원 직원 미투 폭로 "여성 인권 완전히 타락된 사회"

입사 후 6개월 동안 성추행당했으나 피해자 보호조치 전무

기업ㆍ사회 여성근로자 미투ㆍMe too(PG)
기업ㆍ사회 여성근로자 미투ㆍMe too(PG)

[제작 이태호] 사진합성, 일러스트

(춘천=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여성 노동자 인권이라는 게 완전히 타락된 사회였어요. 작은 지역사회라 입소문을 두려워하는 여직원들의 약점을 이용했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그 사람을 고소할 겁니다…"

강원도 모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김모(30)씨는 미투 관련 소식을 볼 때마다 무언가에 짓눌리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그 역시 성추행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무죄라고 주장하지만, 저의 피해는 너무나 분명하고 아직도 생생합니다.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헷갈리는 부조리한 조직에 환멸을 느끼지만 다른 피해자들이 저를 계기로 용기를 갖고 이 작은 조직이 조금은 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김씨는 대학졸업 후 줄곧 수도권 대학병원에서 8년 넘게 계약직으로 일하다 지난해 6월 강원도의 한 의료원 원무팀으로 직장을 옮겼다.

작은 의료원이지만 정규직이라는 조건을 보고 입사했다.

그러나 고용 안정의 기쁨은 잠시였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A(41)씨로부터 상습적인 추행을 당하면서 악몽 같은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김씨에 따르면 A씨는 상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수시로 신체접촉을 유도했다.

어깨나 목에 손을 가져다 대는 일은 예사였다. 서 있거나 복사를 하고 있으면 "뭐하니?"하는 목소리와 함께 몸이 바짝 붙어왔다.

나란히 걷기라도 하면 손동작을 하다 엉덩이나 가슴을 손으로 쳤다.

같은 사무실에 있는데도 다른 남자직원과 발기부전 치료제를 건네받으며 음담패설을 일삼았다.

마주 볼 때마다 시선은 가슴에 꽂혀있었다.

단순히 우연인 줄만 알았던 행동이 반복되자 불쾌한 감정이 들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미투 (me too) (PG)
미투 (me too) (PG)

[제작 최자윤, 조혜인] 일러스트

"너보다 어리고 예쁜 애 들어오면 그쪽으로 넘어갈 거야. 조금만 참아. 원래 병원에서 변태로 소문이 자자하니까 조심하고…"

주변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으나 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진 이는 없었다.

김씨는 이때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막막함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이 부족해서인 것만 같아 자괴감이 들었고, 퇴사를 고민하다가도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감히 퇴사를 결정할 수 없어 괴로웠다.

부정적인 사고회로에서 벗어날 수가 없던 그는 수면제 힘을 빌려 잠을 이뤄야 했다.

고통을 호소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노력했다.

어떤 날은 용기를 내 A씨에게 "왜 자꾸 엉덩이를 쳐요"라고 큰소리쳤으나 A씨는 "네가 거기 있었잖아"라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했다.

의료원에는 성희롱 고충 처리 매뉴얼조차 없었다.

인사담당자에게 어렵게 피해를 이야기했으나 오히려 고충 상담 후 인사담당자가 근무 외 시간에 지속해서 연락을 해오며 밥을 먹자고 했다.

김씨에게는 강요 아닌 강요처럼 느껴졌다.

인사담당자는 술에 취해 밤마다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이를 거부하자 이때부터 병원에서는 뜬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씨가 인사담당자에게 잘 보여 정규직으로 채용된 것이라는 얘기부터 김씨가 A씨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 먼저 꼬리를 쳤다는 얘기였다.

주변 직원들은 물론 김씨를 잘 알지 못하는 직원들까지 그를 기피했다.

'몇 달 동안 그렇게 추행을 당했으면 바로 조치를 했어야지 인제 와서 신고한 건 자기도 좋았던 아니냐'하는 얘기까지 들었지만 변명할 기회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 김씨에 대한 A씨의 추행은 줄어들었으나 타깃만 바뀌었을 뿐 A씨의 추행은 계속됐다.

자신에게 했던 수법 그대로 다른 여직원을 추행하는 보면서도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A씨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여직원에게 "나중에 네 남편은 좋겠다"는 불쾌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그는 김씨에게 "인사담당자가 너한테 연락했었다며? 그 얘기 내가 다른 남자직원들에게 다 퍼뜨렸다"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얘기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김씨는 지난해 12월 A씨를 상습강제추행과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고, 사건은 지난 2월 검찰에 넘겨졌다.

그 사이 김씨는 불면증이 심해지고 우울감과 불안까지 느껴 병원에 지난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3주간 입원했다.

현재 해바라기센터를 다니며 면담도 하고 약도 먹으며 우울증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가해자인 A씨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다니고 있어 복귀가 망설여지는 상황이다.

강원도 상임인권보호관이 2월 의료원 내 성희롱 실태를 조사해 2차 피해방지대책과 피해자 사후 보호조치 등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으나 의료원 측은 몇 달이 지나도록 피해자 보호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고 있다.

의료원은 최근 A씨에 대한 징계위원회를 열었으나 징계위는 재판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고 결정하자며 징계를 미뤘다.

김씨는 "피해자는 추행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힘든데 가해자 징계는 법리적인 기준에만 맞춰야 한다면 어떤 일반 직장인들이 성폭력 피해를 얘기할 수 있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해당 의료원 관계자는 "징계 결정에 대한 방향을 다시 정리해보려고 한다"며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conany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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