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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 "남성들의 문단에서 50년간 이 갈며 시 썼죠"

송고시간2018-03-29 07:05

4년 만에 새 시집 '작가의 사랑' 출간…"상처받은 여성들 생명 복원하는 레퀴엠"

문정희 시인.
문정희 시인.

ⓒ이재훈 [민음사 제공]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1969년 등단해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었는데 이루 다 말할 수 없지요. 이렇게 살아남은 비결을 누군가 물었을 때 너무나 멋없는 대답이지만 이렇게 말했어요. '이를 갈고 시를 잘 썼습니다'라고요."

문정희(71) 시인(동국대 석좌교수)은 29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그동안 남성 중심의 문단에서 어려움을 헤쳐온 50년의 세월을 이렇게 돌아봤다.

"견제당하고 왕따당하고 그랬습니다. 그럴 때마다 견디고 이겨내고, 때로는 너무 분하지만 참고…결국은 내공밖에 없더군요. 오늘날 이만큼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힘은 철저하게 내공을 쌓으며 홀로서기를 했기 때문일 거예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시를 잘 쓰려고 노력했고, 해외 어디서 초청받으면 제 몫을 하기 위해 그 나라의 문학에 관해 더 공부하고 그랬지요."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그는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대', '별이 드면 슬픔도 향기롭다',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 '다산의 처녀' 등 많은 시집을 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목월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받았으며, 해외에서는 스웨덴 하뤼 마르틴손 재단이 주는 시카다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시집은 해외에서 11개국어로 번역 출간됐고, 지난 2년 동안에만 10여 차례 해외에 초청돼 세계 독자들을 만났다. 국내 시단에서 현재 그만큼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시인을 꼽기도 어렵다.

이제는 '여성'이란 수식어를 빼고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부를 수 있지만, 그는 스스로 '여성 시인'인 것이 너무나 좋다고 했다.

"여성성이란 것은 사회적 타자나 약자, 제2의 성이 아니라 대지모(大地母), 엄청난 생명의 원형이자 늑대 같은, 누구도 이 혼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힘이 본질적으로 내재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시인은 여성이어야 해요. 여성은 창조주니까요. 그래서 '여성 시인'이라는 게 참 좋아요. 이제 가닥을 잡은 느낌이랄까. 아직 부족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런 그의 완숙한 세계가 담긴 시편들이 모여 새 시집 '작가의 사랑'(민음사)이 출간됐다. 2014년 펴낸 '응' 이후 4년 만에 내는 열네 번째 시집이다. 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거침없이 자유로운 언어와 정신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시집 역시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공간의 경계를 허물며 세계를 넘나들어 온 시인이 결국 도처에서 마주한 것은 폭력에 상처받은 여성들의 아픔이다.

"한국 시사(詩史)가 100년이 넘었고, 저 또한 어린 시절부터 60년간 시를 쓰면서 이제는 어떤 국경이나 경계가 무의미하게 세계를 품고 넘나들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에도 제 시들은 진정한 생명과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죠. 그런데 그런 노마드적인 족적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문제가 대두되고 도처에서 여성의 상처,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과 부당함 이런 것들과 만나게 되더군요. 요새 '미투'가 나왔지만, 저는 30∼40년 전부터 여성의 언어에 대한 자각을 일찌감치 하면서 피투성이인 목청을 드러내 왔습니다. 이번엔 그런 것들에 대한 레퀴엠의 절정으로 생명을 복원하는 몸부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이번에 내놓은 시편들에서 훼손당한 여성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프랑스 문학상 공쿠르상에 맞서 페미나상을 제정한 시인 안나 드와이유, 독재자 앞에서 차도를 찢어버린 오리아나 팔라치, 해방 공간에서 간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김수임, 남성 문인들로부터 인격 살해에 가까운 공격을 당한 근대 최초 등단 작가 김명순 등이 등장한다.

'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는 특히 절절하다.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여자의 모든 것이 끝이 났다./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처녀 아닌 탕녀!/처절한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중략)/처음 그녀를 불러내어 데이트 강간을 한/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은/애국지사의 딸과 결혼하여 친일의 흔적까지 무마하고/대한민국 국방 경비대 창설로, 초대 육군 참모총장으로/훈장과 함께 지금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탄실 김명순은 피투성이 알몸으로 사라졌다./(중략)/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70여 년/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곡시' 중)

"시인이며 백작 부인/안나 드와이유는/불과 얼마 전의 여인/첫 번째 공쿠르상 수상자가 되었지만/여자라는 이유로/다른 사람이 수상자로 호명되었을 때/즉시 페미나상을 만들고/심사위원 전원을 여성으로 구성했지/사실 이런 개판은 어디에나 있는 일" ('살아 있는 것은' 중)

그는 지난달 최영미 시인이 '괴물'로 문단 권력과 성폭력 문제를 폭로한 것에 관해서는 "최영미 시인만이 할 수 있는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이라며 "나는 30년 전부터 여성의 몸을 성의 도구로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부터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얘기해왔는데, 최영미 시인이 이번에 시의적절하게 직설화법으로 드러냈다"고 했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인 '작가의 사랑'도 시인의 세계관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남미와 아프리카와 유럽과 동아시아 작가가/한방에 모여 사랑을 이야기하자고 한 밤//내가 불쑥 말했어/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누구나 입고 있지만/나 팬티 입었다고 소리치지 않아/먼저 팬티를 벗어야 해//우리는 팬티를 벗었어/하지만 나는 끝내 벗지 못한 것 같아/눈만 뜨면 팬티를 들고 흔드는 거리에서 자란/나는 하나를 벗었지만, 그 안에/센티멘털 팬티를 또 겹겹이 입고 있었지//사랑은 참 어려워/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작가의 사랑' 중)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는 표현은 찰스 부코스키의 시에서 인용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너무 일사불란하고 만장일치로 같은 것을 일제히 부르짖는 그런 폭력성이 좀 쓸쓸해요. 하지만 저 역시 그 속에서 지금까지 자라고 뼈가 굵었기 때문에 애국이나 민족에 매이지 말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장 깊이에는 그런 팬티를 입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죠. '코리아'라는 반도에 대한 지극한 감성적 센티멘털한 사랑을 속이지 못한다는, 어쩔 수 없는 그런 마음을 담았습니다. 저는 한국 시의 세계화 같은 것에는 관심 없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작가는 철저히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 문학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내면 깊이에는 한국 시인으로서 모국어가 내 어머니니까 그에 대한 사랑을 묻고 있는,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문정희 시인 "남성들의 문단에서 50년간 이 갈며 시 썼죠" - 2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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