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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폭력 없는 전쟁의 실험자…비폭력은 적극적 투쟁"

조길태 명예교수 '인도 독립운동사' 출간
지난 8월 15일 인도 독립기념일을 맞아 아이들이 간디의 초상화를 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8월 15일 인도 독립기념일을 맞아 아이들이 간디의 초상화를 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영국 정부의 시각으로 볼 때 간디는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비폭력을 앞에 내세울 뿐 어떤 폭력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보다 과격한 이론과 행동의 소유자였다."

인도 독립투쟁의 중심에 섰던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위대한 성자(聖者)로 극찬받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영국인에게 이용당한 도구에 불과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40년간 인도사를 연구해온 조길태 아주대 명예교수는 신간 '인도 독립운동사'에서 간디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간디는 폭력 없는 전쟁의 실험자였다"면서 "비폭력 행동은 소극적 저항이 아닌 적극적 투쟁"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간디 사상의 뿌리가 '진리 추구'를 뜻하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였다고 강조한다.

간디는 처음에 사티아그라하를 소극적 저항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지만, 차츰 두 용어의 쓰임새를 차별화했다. 사티아그라하를 물리적 힘에 대한 정신력의 우위에 근거한 도덕적 무기로 규정하고 모든 형태의 폭력 사용을 거부했다.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 있던 인도 독립운동 세력은 간디의 등장을 계기로 통합된다. 간디는 1917년 인도에서의 첫 번째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펼치면서 비폭력, 비협조를 주장했다.

이어 1930년에는 제2차 사티아그라하 운동인 시민 불복종을 이끌었다가 구속되는 곡절을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에는 영국 세력 철퇴 운동을 주도해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결국 인도는 1947년 독립했으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파키스탄이 떨어져 나갔다. 두 나라의 통일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간디가 인도의 독립에 기여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으로 인해 간디의 목표는 좌절됐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간디는 인도를 영토보다는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다"며 "인도는 6세기 넘게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는 등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유지해 왔지만, 편협한 종파적 민족주의에 편승해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립됐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어 "간디는 진실한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접근하면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조국의 분할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한다.

책은 인도 독립운동사 전반을 다뤘지만, 간디에 대한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부록으로 한국과 인도의 독립운동을 비교한 글을 실었다.

민음사. 764쪽. 3만5천원.

"간디는 폭력 없는 전쟁의 실험자…비폭력은 적극적 투쟁" - 2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9/14 11:02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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