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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즘이 계속 고개를 드는 시대…대응할 방법은

'나치의 아이들'·'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나치즘이 계속 고개를 드는 시대…대응할 방법은 - 1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미국에서는 최근 백인우월주의자들의 대규모 폭력시위가 논란이 됐다. 시위대는 나치 상징 깃발을 흔들었고 이들과 연계된 신(新)나치주의 신봉 사이트는 시위로 희생된 여성을 조롱했다.

나치의 악몽이 끝난 지 7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곳곳에 나치즘이 살아 있음을 목격하는 시대, 나치즘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 책들이 나란히 나왔다.

신간 '나치의 아이들'(갈라파고스)은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나치즘의 망령을 막기 위해 끊임없는 문제 환기를 주장한다.

저자 타냐 크라스냔스키는 이 책에서 고위급 나치의 자녀 8명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아버지의 꼬리표를 떼고 싶을 법도 하지만 상당수 자녀는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아버지를 경배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치 친위대장이었던 하인리히 힘러의 딸은 성(姓)을 밝힐 때마다 해고되거나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등 수난을 당했지만, 아버지의 성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는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여전히 믿지 않고 있으며 과거에 독일 군인이었던 사람들이 나타나 아버지의 무고함을 증명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나치 경력자들을 돕는 기관에서 일하고 독일 극우파들을 지지한다.

'나치 정권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의 딸도 마찬가지다. 그는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돌린다. 루돌프 헤스 부통령의 자녀 역시 전범재판에서 아버지에게 내려진 무기징역 판결이 부당하다고 여기며 아버지의 복권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의 딸도 아버지가 고문을 당해 살인을 자백했다고 생각한다.

8월19일 루돌프 헤스 부통령의 기일을 맞아 베를린에서 열린 극우단체와 신나치주의자들의 시위 모습[EPA=연합뉴스 자료사진]
8월19일 루돌프 헤스 부통령의 기일을 맞아 베를린에서 열린 극우단체와 신나치주의자들의 시위 모습[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책은 나치 자녀들이 전쟁범죄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지만, 이들이 이런 태도를 가진 데에는 전후 국가재건을 위해 나치 문제에 침묵했던 독일이 있음을 암시한다.

당시 다수의 서독인은 역사의 페이지를 얼른 넘겨버리고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어 했다. 책임은 히틀러에게 전가됐다. 1970년대에 와서야 독일은 역사교육에서 나치의 실상을 전면에 드러냈다.

'양철북'의 저자 귄터 그라스가 2006년에야 자신의 나치 친위대 복무 경력을 밝힌 것도 역사와 대면을 꺼렸던 독일의 무언(無言)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나치즘에 대해 후세에 완벽히 전달하는 일이다. (중략) 만일 나치체제 고위급 인사들의 이름들이 미래에 대한 경고처럼 울려 퍼질 필요성이 있다면 계속해서 그 시대에 대한 앎을 훼손시키지 않은 채 간직해야 한다. (중략) 그와 관련해 증언할 수 있는 희생자들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더라도,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나치들을 쫓는 일이 종결되더라도,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반향을 이끌어낼 것이다". 이현웅 옮김. 372쪽. 1만7천500원.

나치즘이 계속 고개를 드는 시대…대응할 방법은 - 3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사계절)은 히틀러와 동시대를 살았던 찰리 채플린과 그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둘러싼 이야기다.

1889년 4월16일 런던에서 채플린이 태어난 뒤 4일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히틀러가 태어난다. 예술가를 꿈꿨던 두 사람은 청년기를 보내며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선전·선동에 미디어를 십분 활용했던 나치는 역시 영화라는 미디어에서 큰 힘을 발휘하던 채플린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실제 채플린은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채플린은 나치의 공격 대상이 됐다. 평화주의자인 채플린이 독일에서 인기가 많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지녔다는 점도 공격의 이유였다. 공교롭게 두 사람 모두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다. 히틀러가 패러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나치는 채플린을 철저하게 배격하기 시작했다.

1935년 말부터 채플린 영화는 제3제국에서 사라졌고 관련 서적 출간은 물론 호의적인 논평이 금지됐다. 채플린 영화는 1956년에야 독일에서 다시 상영될 수 있었다. 콧수염 비교는 물론 불가능했다.

채플린과 히틀러의 '대결'은 채플린이 히틀러 풍자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제작하면서 본격화됐다. 나치는 외교적으로 항의를 제기하며 영화 제작을 방해했다. 1939년 당시 아직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영국도 제작을 막기 위해 나섰고 미국에서도 제작 중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온갖 압박에도 채플린은 영화를 완성했고 1941년 2월말 기준 전세계에서 3천만명이 '위대한 독재자'를 관람했다. 영화를 둘러싼 대결은 채플린의 '압승'으로 끝난다.

저자인 일본의 채플린 연구가 오노 히로유키는 채플린과 히틀러의 이야기에서 테러와 분쟁, 극단주의에 대응할 방법에 대한 힌트를 발견한다.

"채플린과 히틀러가 한 시대와 사고의 결정체라고 본다면 '채플린적인 것'과 '히틀러적인 것'의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중략) 이미지를 무기로 한 미디어라는 전쟁터에서는 독성이 강한 거짓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허위 선전이 진실을 압도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도 채플린의 이미지가 히틀러의 이미지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다. 전세계 사람들이 웃었기 때문이다. 오직 우직함과 유머만이 '히틀러적인 것'에 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위대한 독재자'는 가르쳐 준다"

양지연 옮김. 352쪽. 1만6천800원.

zitron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8/22 16:0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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