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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안익태와 애국가

(서울=연합뉴스) "해외에서 조선 음악계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고 있는 우리 음악가 안익태 씨는 금년 여름 헝가리 부다페스트 방송국에서 자작의 '심포니크 판타지 코레아(조선환상곡교향곡)'를 '컨덕'하여 구주(歐洲) 전국에 중계방송하였는데 최근 통신에 의하면 지난 10월 31일 독일 백림(베를린)에서 유명한 관현악단 '베를린룬드풍크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 씨의 비범한 악재(樂才)를 발휘하였는데 이 연주는 특히 초단파로 전 세계에 중계방송되어 구미 각국의 음악가 사이에 큰 화제가 되어있다. 안씨가 특히 서구 음악가 사이에 높이 평가되는 것은 씨의 '컨덕'의 재능도 재능이려니와 당일 방송한 자작의 '심포니크 판타지 코레앙'이 조선 독특의 '멜로디'를 살려 서구인이 이때까지 잘 표현할 수 없던 동양적인 정서를 씨의 특이한 예술적 천품으로 묘하게 그린 점이다." (동아일보 1938. 12. 11.)

'전파 타고 전 세계에 퍼진 조선환상교향곡' 제하의 위 기사는 일제강점기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던 음악가 안익태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암울했던 시기, 그가 '심포니크 판타지 코레아,' 즉 '한국 환상곡'을 지휘하는 모습에서 우리 민족은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40년 전 1977년 7월 8일 안익태의 유해가 국립현충원 (당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제2 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세계를 떠돌던 그의 예술혼이 고국에서 안식을 찾은 것이다.

등록문화재 제476호 안익태 대한국 애국가 자필 악보 (문화재청 제공)
등록문화재 제476호 안익태 대한국 애국가 자필 악보 (문화재청 제공)

안익태가 애국가를 완성한 것은 1935년 말로 추정된다.

안익태는 1936년 3월 26일 재미동포 애국 단체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에 '대한국 애국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1930년 9월) 미주에 온 후 제일 급선무로 '대한국 애국가' 근작을 깊이 느끼고 작곡하기로 그때 결심했습니다. 재래로 부르는 애국가 곡조는 스코틀랜드 술 노래였는데 신성한 '대한국 애국가'로 그 곡조를 사용함은 대한국의 수치인 줄로 자각하였습니다. 과거 오 년간 구심 근작 하여 약 이년 전에 처음 절은 필하였습니다마는 후렴은 필하지 못하고 지나던 중 지난 십일월(1935년) 하루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실로 하나님의 암시로 후렴 전부를 근작 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동포들이 '올드 랭 사인' 곡조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안타까워 5년에 걸쳐 애국가를 작곡했다는 것이다.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는 1935년 12월 28일 시카고 한인교회에서 처음 발표됐다. 이어 1936년 초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명의로 '대한국 애국가(Korean Nation Hymn)'로 신한민보에서 악보를 인쇄, 권당 20센트에 판매됐다.

애국가의 곡조가 일부 들어간 '한국 환상곡'은 안익태가 1936년 작곡한 뒤 1938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초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익태는 유럽, 미국 등 각국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마다 이 곡을 빠뜨리지 않았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다가 월북한 음악가 박은용은 1948년 10월 7일 동아일보에 실린 '애국가고(愛國歌攷)'라는 제하의 기고에서 안익태 작곡 애국가가 국내로 들어오게 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미국에서 전해 온 것은 1946년 5월이다. 현 정부 노동국에 근무하고 있는 배민수 목사가 미국에서 군속으로 귀국하게 된 그 길로 이화여자중학교에 따님을 찾으러 방문하여 기념 선물로 불러준 것이 현재의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로서 이 곡조가 조선에서 불리워진 시초인가 하는데 필자는 그 즉시로 배 목사에게서 그 악보를 구수 받아 학생들에게 지도를 하고 1주일 후 이화합창단이 방송을 통해서 첫 소개를 하였었다. 비로소 이렇게 하여 우리들은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애국가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 뉴욕판에도 역시 작사자의 이름은 생략되어 있고 작곡자 명만이 인쇄되어 있었다…"

애국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국가가 됐다. 그러나 작사자는 여전히 '작자 미상'이다. 지금까지 애국가 작사자로 윤치호와 안창호가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 그러나 특정 인물을 작사자라고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애국가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명이 만들고 고치면서 완성된 것이라 보는 것이 적절하다.

1942년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 홀에서 지휘하는 안익태. (조선일보 제공)
1942년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 홀에서 지휘하는 안익태. (조선일보 제공)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집이 유복하여 어려서부터 여러 악기를 접할 수 있었다. 1918년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자 축음기와 첼로를 선물 받았고 캐나다인 선교사에게서 특별 음악수업까지 들었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뒤 학교에서 친일교사 추방운동을 주도, 무기정학을 당하고 반일 학생으로 쫓기다가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26년 도쿄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졸업했으나 경찰이 막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안익태는 신시내티, 필라델피아,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부했다.

안익태는 1936년 유럽으로 건너와 1938년부터 1941년까지 헝가리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음악예술대학에 재학하면서 코다이 졸탄, 쉬페르 아돌프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을 사사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의 멘토였다.

그는 1944년 당시 중립국이던 스페인으로 이주해 귀화했고, 1946년 스페인 여성과 결혼해 지중해의 작은 섬 마요르카에 정착했다.

안익태는 광복 후 1955년 3월 19일 2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80회 탄신경축 음악회에서 해군 정훈 음악대가 연주하는 '한국 환상곡'을 지휘했다. 이어 1962년부터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했다.

그는 1965년 9월 1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숨을 거뒀다. 마요르카에 묻혔다가 1977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됐다. 2005년 3월 16일 안익태의 유족은 애국가 저작권을 한국 국민에게 무상 양도하겠다며 우리 정부에 기증서를 전달했다. 이로써 애국가는 영원히 한국 국민의 것이 됐다.

고 안익태 유해 국립현충원 안장
고 안익태 유해 국립현충원 안장

안익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 홀에서 열린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자신이 작곡한 축전 음악 '큰 관현악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를 지휘했다. '한국 환상곡'의 선율 일부가 이 만주국 축전 음악의 선율과 흡사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앞서 1941년 일본명절 명치절(11월 3일)에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일본공사관에서 기미가요 제창 때 안익태가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일본 외교관의 증언도 있다.

당시 상황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이러한 행적은 유감스럽다. 민족을 위해 자진해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와, 자신의 음악적 성공을 위해 일제에 협력한 안익태. 그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공과가 함께 다뤄져야 한다.

작사가로 유력시되는 윤치호는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지냈으나 친일파로 돌아섰다. 애국가를 작사한 사람이 윤치호라면 애국가의 작곡가와 작사가 모두가 친일 논란에 휩싸이는 것이 된다. 우리는 언제나 친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시대 지도층 상당수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여러 독립운동가의 삶에 견주어볼 때 그들의 삶은 실망스럽고 또 안타깝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6/29 07:3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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