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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친일법관' 불신한 승려 6명 대법원서 일본도로 할복했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대한민국 최고 법원인 대법원이 수개월째 시끄럽다.

대법원이 판사 성향과 동향을 파악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해 왔다는 의혹 때문이다.

4.19 혁명
4.19 혁명

해당 의혹은 올해 3월 사표를 낸 이모(39) 판사의 진술을 계기로 불거졌다.

이 판사는 법관 400여 명의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추진하던 대법원장 권한 분산 세미나를 축소하라는 상부 지시에 반발해 사표를 내면서 법관 감시 의혹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판사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린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고 들었다"고 발언한 것을 계기로 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대법원은 진상조사를 벌여 "블랙리스트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는 어떤 정황도 나오지 않았다"며 이 판사 주장을 일축했다.

1975년 12월 17일 서울 조계사에서 봉행된 조계종 호국승군단 발단식
1975년 12월 17일 서울 조계사에서 봉행된 조계종 호국승군단 발단식

판사들은 조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며 6월 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어 독자 진상 조사권 인정과 일부 대법원 컴퓨터 보전 등을 요구했다.

전국 단위 판사 모임은 2009년 신영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시절 광우병 촛불 시위 재판에 개입한 의혹으로 소집된 지 8년여 만에 처음이다.

법원은 사법부 독립과 공정성 등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진통을 겪었으나 가장 충격적인 일은 1960년 대법원 승려 할복사건이다.

이 사건은 불교계 내분으로 시작됐으나 사법부 불신과 재판 정보 사전 유출로 악화했다.

불교계에서는 출가 후 독신으로 살아가는 비구와 부인을 둔 대처승이 일제 강점기부터 갈등을 빚었다.

세력 분포를 보면 대처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조선총독부가 한국 전통불교를 말살하려고 1911년 사찰령을 내려 전국 31개 본산 주지에 대처승을 우선하여 임명하는 등 특혜를 준 결과라고 비구들은 주장한다.

대처승은 불교 총무원은 물론, 전국 주요 본·말사를 장악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국회의원 6명을 배출할 정도로 막강했다.

6·25전쟁 정전협정 이후 대처승 숫자는 7천 명을 넘었고 가족 등을 합치면 수만 명에 달했다.

[숨은 역사 2cm] '친일법관' 불신한 승려 6명 대법원서 일본도로 할복했다 - 2

세속 인연을 끊고 주로 참선에 몰두해온 비구는 대체로 젊은 데다 인원은 600명 미만이었다.

수면 밑에 머물던 양측 간 갈등이 폭발한 것은 1954년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왜색불교 퇴치를 요구한 비구 측 건의를 수용하고서 힘을 실어준 것을 계기로 불교 정화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대통령이 대처승을 불신한 것은 개인 경험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문수사에 들렀다가 빨랫줄에 널린 아기 기저귀와 여자 속옷을 목격한 데다 성북구 신흥사가 기생 술판으로 변한 사실을 알고 특단의 대책을 결심한다.

원로 비구 5명을 경무대(청와대)로 불러 "내가 도와줄 테니 한국 정통 불교로 돌아가라"고 요청한 데 이어 대처승을 불법화하는 포고령을 내린다.

비구 측은 막강한 대통령 지원에 힘입어 조계사를 접수하는 한편 독신, 삭발, 술·담배·고기 거부 등 8개 항을 지키지 못하는 승려는 사찰을 떠나라고 대처승을 압박했다.

이렇게 해서 1955년 8월 대한불교조계종을 출범시키고 종단 중앙과 일부 사찰을 확보하게 된다.

대처승들은 이런 조치에 승복하지 않았다.

승려대회에서 만든 종헌을 토대로 종정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을 뽑은 것은 절차상 잘못이라며 소송을 냈다.

법정 다툼은 엎치락뒤치락했다.

1956년 1심 재판부는 대처승 손을 들어주었으나 이듬해 항소심에서는 비구 측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후 대법원 상고심 선고가 무작정 미뤄지면서 불교계 내분이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1960년에 다시 점화한다.

4·19혁명으로 비구의 버팀목이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대처승들이 대반격에 나섰다.

대처승들은 조계사, 해인사, 통도사, 화엄사 등 전국 유명 사찰을 접수하는 등 종단 주도권을 다시 장악했다.

세력이 약한 비구 측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어느 순간 초강경 태도를 보인다.

[숨은 역사 2cm] '친일법관' 불신한 승려 6명 대법원서 일본도로 할복했다 - 3

3년간 침묵하던 대법원 움직임이 심상찮다는 징후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 부역세력 청산 등을 외치는 여론이 비등한 상황에서 갑자기 대법원이 확정판결을 서둘렀다.

일본 강점기 판·검사나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던 친일파 법조 엘리트들이 사법부 상층부를 장악한 탓에 대법원은 대처승을 편들 것으로 비구 측은 의심했다.

실제로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공개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당시 대법관 가운데 3분의 2가 친일파로 등재됐다.

대법원은 일제 강점기 민족 변호사로 유명한 김병로 대법원장이 이승만 정권 초기에 외풍을 잘 막았으나 퇴임 이후에는 정치권력에 취약했다.

자유당 정권의 최대 언론탄압으로 꼽히는 경향신문 정간과 관련해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계속 미루던 대법원이 4·19혁명 직후 서둘러 판결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1959년 선거가 불공정하면 폭력 혁명이 생길 수도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가 정간조치를 당했다.

사법부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대법원 판결이 임박해지자 비구 측 승려 800여 명이 조계사에 모여 불교대회를 열고 단식농성, 혈서 작성 등 과격 투쟁에 돌입한다.

대법관들이 거액에 매수됐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농성장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진다.

젊은 승려 20명은 순교 단을 구성해 패소 판결이 나면 목숨을 끊기로 결의하는 등 '벼랑 끝 전술'도 병행한다.

판결 하루 전에는 비구 측에 불리한 결론이 이미 내려졌다는 정보가 입수돼 분위기가 극단으로 치달았다.

불교 신자인 한 대법관 부인이 판결내용을 집에서 듣고 불교 정화를 주도하던 청담스님에게 귀띔해줬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비구승 500여 명은 조계사에 모여 철야 단식농성을 하며 집단 순교를 결의한다.

운명의 날인 1960년 11월 24일 소문대로 비구 측 패소 판결이 내려진다.

고법 판결을 파기하고서 원점에서 다시 재판하라는 파기환송을 결정한 것이다.

곧이어 20~30대 젊은 비구 6명은 대법원 청사로 들어간다.

경찰이 청사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서 삼엄한 경계망을 구축했는데도 유유히 검문을 뚫을 수 있었다.

비결은 뛰어난 변장술이었다.

새까만 작업복을 입고 털모자를 덮어쓴 이들은 전날 화신백화점에서 산 30cm 길이 일본도를 몸속에 숨겨 검문 통로를 지났으나 경찰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법원 구내로 들어서자 대법원장실로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비서 외에 아무도 없자 "불법에 대처승이 없는데 왜 사회법으로 판단하느냐. 죽음으로 호소하러 왔다"고 말한 뒤 옷 속에 숨긴 일본도를 일제히 꺼내 할복했다.

경찰이 출동해 이들을 인근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한 덕에 모두 목숨을 건졌으나 청사 밖 승려들은 흥분했다.

한 명이 순교했다는 거짓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숨은 역사 2cm] '친일법관' 불신한 승려 6명 대법원서 일본도로 할복했다 - 4

단식하던 조계사 승려 400여 명은 대법원으로 몰려가 "우리도 전부 다 같이 죽자. 대법원은 돈 먹고 대처승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는 등 구호를 외치며 대법원 구내에 난입했다.

경찰은 353명을 연행해 할복한 6명을 포함한 24명을 특수건조물 침입죄와 특수공무집행 방해 등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모두 이듬해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사법부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승려들의 집단 할복은 최고 법원의 권위를 원천적으로 부정한 행위라는 판단에서다.

할복사건을 계기로 사법부 독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듯했으나 6개월도 안 돼 완전히 사그라졌다. 5·16쿠데타로 권력지형이 다시 바뀌었기 때문이다.

법원은 대처승을 견제하는 박정희 정권의 기류를 간파한 듯 종단 내부 소송에서 줄줄이 비구 측 손을 들어주며 정권 눈치 보기에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사법부 신뢰가 무너졌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하던 법원에서 항명 파동이 처음 일어난 것은 1971년이다.

반공법 위반 등 사건에 무죄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려 정권에 미운털이 박힌 이범렬 부장판사 등의 변호사 향응을 문제 삼아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게 발단이었다.

전국 법관 150여 명이 사표를 냈고, 대한변협 등이 동조 성명을 발표했으나 더는 발전하지 못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사법부는 1988년 소장판사 430여 명이 법원 독립과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명을 벌여 김용철 대법원장을 내쫓았다.

1993년에는 법관 신분 보장을, 2003년에는 기수와 서열순으로 고착된 대법관 인사구조 개편을 각각 요구하며 전국법관회의를 열었다.

항명 파동은 대법관 사퇴 등으로 마무리됐지만, 법원 민주화와 법관 신분 보장, 유리 천장 파괴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효숙 첫 여성 헌법재판관이 탄생하고 김영란 부장판사가 첫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된 것은 사법파동에 힘입은 성과다.

판사블랙리스트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한 최근 전국법관회의도 사법파동 성격을 띤다.

대법원장의 권한 분산과 관료화한 법원행정처 분위기 쇄신 등을 요구했다는 점에서는 사법개혁 마중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가 불투명하고 법관회의 참석자 성향이 다소 편향돼 법원 독립과 악습 혁파를 목적으로 한 종전 사법파동보다 명분과 진정성이 약하다는 지적이 있다.

개혁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인사 평가를 받지 않으려는 일종의 밥그릇 싸움이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평가 내용과 무관하게 내부 파열음이 커질수록 국민의 법원 신뢰는 더욱 떨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숨은 역사 2cm] '친일법관' 불신한 승려 6명 대법원서 일본도로 할복했다 - 5

재판 기준의 하나인 판사 양심이 법관 이해관계를 따라 갈라져 심판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을 키우기 때문이다.

법원 신뢰가 추락하면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헌법상 권리마저 훼손된다는 점에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1971년 이후 사법파동이 4차례나 터졌는데도 내부 불만이 끊이지 않는 것은 '셀프개혁'의 한계로 지적된다.

판사회의가 권한 나눠 먹기 싸움판이라는 비난을 피하려면 개혁 문호를 변호사단체나 법학 교수, 시민단체 등에 활짝 열어야 한다.

어미 닭과 병아리가 달걀 안팎에서 동시에 쪼아대야 부화한다는 줄탁동시의 지혜가 사법개혁에도 필요하다.

hadi@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6/27 10:09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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