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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國富 건져올린 한국 원양어업 60년

1957년 10월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왼쪽 두 번째) 등이 지남호가 잡은 참치(실제는 새치)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연합뉴스]
1957년 10월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왼쪽 두 번째) 등이 지남호가 잡은 참치(실제는 새치)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957년 6월 29일 토요일. 부산항 제1부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가 출항했다. 제1부두의 해양경비대 강당에서 정부 인사와 국회의원, 수산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출어식이 열린 지 사흘 뒤의 일이었다. 지남호의 윤정구 선장은 "출어식에서 보내준 격려를 국가의 지상명령으로 알고 기필코 시험조업에 성공하겠다"고 굳은 결의를 내비쳤다. 조선일보는 6월 27일자 기사에서 "이번 출어에서는 200t 내지 300t 어획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외화 12만 불 획득을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지남호는 미국 시애틀의 수산시험장이 연구 목적으로 49만 달러를 들여 1946년 건조한 종합시험조사선이었다. 230t급 규모에 600마력짜리 디젤기관을 장착하고 냉장실, 방향탐지기, 수심탐지기, 어군탐지기 등 각종 첨단 장비를 갖췄다. 한국 정부는 원조자금 32만6천 달러를 지불하고 1949년 이 배를 도입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富)를 건져 올리라"는 뜻으로 지남호(指南號)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도입 직후 연근해 시험조업에 쓰이기도 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951년 제동산업으로 소유권이 넘겨졌고, 60년 전 이날 역사적인 항해에 나선 것이다.

부산항을 떠난 지남호는 7월 18일 대만 동쪽 해상에서 처음 그물을 던졌으나 허탕만 쳤다, 필리핀과 싱가포르 근해로 옮겨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기름마저 떨어져 싱가포르에 발이 묶였다. 싱가포르의 한국인 무역상에게 2천500달러를 빌려 기름을 채우고 식량을 보충한 뒤 인도양을 향해 출발했다. 광복절인 8월 15일 새벽 5시 마침내 수면 위로 커다란 덩치의 참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어획량은 0.5t에 불과했으나 우리의 배와 기술로 대양에서 처음 건져 올린 수확이어서 의미가 컸다. 보름간 모두 10t가량 잡은 뒤 108일 만에 10월 4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1957년 6월 26일 부산항 제1부두에서 김일환 상공부 장관(오른쪽)이 첫 출항을 앞둔 지남호의 윤정구 선장에게 닻줄을 걸어주고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연합뉴스]
1957년 6월 26일 부산항 제1부두에서 김일환 상공부 장관(오른쪽)이 첫 출항을 앞둔 지남호의 윤정구 선장에게 닻줄을 걸어주고 있다. [한국원양산업협회 제공=연합뉴스]

당시 신문들은 '六日間(6일간)에 漁獲高(어획고) 四千貫(4천관)'(8월 23일 경향신문), '印度洋(인도양) 漁擄(어로)에 凱歌(개가)'(10월 16일 경향신문), '참치 多量漁擄(다량어로) 遠洋船(원양선) 指南號(지남호) 歸港(귀항)'(동아일보 10월 17일) 등의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지남호가 잡은 물고기를 보고 싶다고 하자 사람 키보다 큰 참치(실제는 새치)를 부산에서 비행기로 긴급 공수해 경무대 뜰에 걸어놓고 대통령과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가 외화 획득에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짐작하게 하는 일화다.

윤 선장은 1958년 1월 다시 지남호를 이끌고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상업조업의 시작이었다. 훗날 동원그룹을 일군 김재철도 실습항해사 자격으로 배에 올랐다. 동승한 문제안 한국일보 기자는 "태평양의 거센 파도를 헤치고 남으로 5천 마일이나 달려가 7∼8개월간을 구름과 수평선만을 바라보며 참치잡이를 할 지남호. 더구나 그것이 개인의 영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국의 경제 재건을 위한 외화 획득이라는 대의명분이 있고, 한국 원양어업사의 첫 페이지를 기록한다는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고 썼다. 지남호는 사모아 근해에서 1년여 동안 6차례 출어해 450t의 참치를 잡아 당시로는 거액인 9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지남호의 성공에 자신을 얻은 제동산업은 1959년 5월 지남2호와 지남3호를 사모아 어장에 추가 투입했다. 고려원양, 오양수산, 사조산업 등도 잇따라 원양어업에 뛰어들었고 김재철은 지남2호 선장을 거쳐 동원산업을 창업했다. 지남호 윤 선장은 고려원양 부사장과 오양수산 사장을 역임했다. 1957년 한 척으로 시작한 우리나라의 원양어선 규모는 20년 뒤 850척으로 늘어났으며 1990년엔 해외 기지가 28곳에 이르렀다. 선원 수는 1976년 2만2천890여 명을 헤아렸다. 1958∼1979년 우리나라가 원양어업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약 20억 달러로 당시 이 기간 우리나라 수출액의 5%를 차지했다. 1965∼1975년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모국으로 보낸 송금액 1억153만 달러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 원양 선원들은 다양한 수산물과 가공품 등으로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가 하면 대서양 스페인령 라스팔마스와 남태평양 사모아 등에 한인사회를 건설하기도 했다.

대서양 스페인령 라스팔마스 공동묘지의 한국인 선원 납골당. [해양수산부 제공=연합뉴스]
대서양 스페인령 라스팔마스 공동묘지의 한국인 선원 납골당. [해양수산부 제공=연합뉴스]

그러나 원양 선원들의 노고는 교과서에도 실린 파독 광부·간호사는 물론 파월 장병과 중동의 건설 노동자 등에 비해서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업계 종사자들의 하소연이다. 숱한 선원이 조업 도중 순직했으며, 국내에 돌아오지 못한 채 현지에 묻힌 이들의 묘소도 296기에 이른다. 한국원양산업협회는 2002년부터 정부 지원을 받아 이들 묘지를 관리하고 있으며, 2014년부터 국내 이장 사업도 펼쳐 22위의 유해를 봉환했다. 29일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열릴 지남호 출항 60주년 기념식에서는 기념 조형물 제막식도 치러진다.

우리나라 원양어업의 현주소를 보면 예전의 영화를 짐작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200해리 배타적경제수역 선포로 어장이 좁아진 데다 수산자원도 줄어들어 1992년 100만t에 이르던 원양어선 어획량은 지난해 45만t으로 쪼그라들었다. 원양업체 수도 2002년 131개에서 2015년 67개로 급감했다. 333척으로 줄어든 선박은 노후화하고, 5천100여 명의 선원도 고령화돼 한국인 선원들이 떠난 자리를 동남아 선원들이 대체하고 있다. 원양산업 중흥을 위해 정부의 지원과 함께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한 해외 수산자원 확보, 원양어선 풀(Pool)제 도입 등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세월의 흐름 속에 어떤 산업이든 부침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해도 거친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대한민국의 희망을 건져 올렸던 바다 사나이들의 땀과 눈물 만큼은 잊혀서는 안될 일이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國富 건져올린 한국 원양어업 60년 - 4

heeyo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6/27 07:3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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