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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전 이란 쿠데타에 美CIA '중심역할' 문건 추가공개

"쿠데타가 민족주의 불길에 부채질…서구민주주의 추구 자생 자유주의 세력 질식"
쿠데타 지원 거리시위대 동원한 성직자는 美에 자금 요청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오늘날 국제정세를 결정짓는 여러 악연의 근원을 찾자면 끝없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지만, 현대사로 한정해 미국과 이란 간 숙적 관계, 더 크게는 중동지역의 끝없는 불안과 이슬람국가(IS)의 테러리즘을 비롯한 폭력의 근원을 더듬어 찾아가다 보면 1953년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합작 지원한 이란 군부 쿠데타를 만나게 된다.

1953년 이란 쿠데타 당시 도심 거리에 나선 탱크. 출처:미국 국가안보기록보존소.
1953년 이란 쿠데타 당시 도심 거리에 나선 탱크. 출처:미국 국가안보기록보존소.

이 쿠데타에 대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개입은 미국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기정사실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지난주 비밀해제된 1천 쪽에 이르는 문건에는 CIA가 이 쿠데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사실과 CIA가 한때 쿠데타에 실패했다고 보고 손을 떼려 했다가 막판에 중단 명령을 어긴 현지 책임자의 공작을 통해 성공으로 반전된 과정이 상세히 드러났다고 포린 폴리시가 20일(현지시간) 전했다.

당시 총선을 통해 집권한 무하마드 모사데그 총리를 쫓아내고 도피성 외유 중이던 팔레비를 불러들여 왕정을 복구한 암호명 '아작스(Ajax) 작전'은 궁극적으로 석유 때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 자본의 아라비안 아메리칸석유(아람코. 1980년 사우디 정부에 의해 국유화)가 1950년 말 사우디정부의 압박에 굴복,수익을 사우디와 50대 50으로 반분키로 합의함에 따라 이란에서도 영국계의 앵글로-이란 석유 역시 같은 압박을 받았으나 영국은 완강하게 거부하던 상황이었다.

1951년 초 모사데그가 국유화를 선언하자 뿔난 영국은 CIA를 졸라서 모사데그를 축출하는 데 착수했다.

쿠데타 60주년인 2013년 공개된 CIA 내부 보고서는 이 군사 쿠데타가 "CIA의 지시하에 수행됐다"며 1953년 쿠데타 실행 이전부터 모사데그 총리를 공격하는 언론 보도 등을 통한 선전 활동, 팔레비 왕조와 제휴 시도, 이란 국회의원 매수, 대중시위 선동 등의 공작활동을 했음을 보여줬다.

새로 공개된 전문들을 보면 당시 미국 국무부 일각에선 석유 이익을 나누는 데 대한 영국의 비타협적 태도를 비난하면서 모사데그와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고 포린 폴리시는 설명했다.

1953년 8월 15일 쿠데타 시도가 시작됐으나 모사데그가 신속히 관련자 수십 명을 체포하고 주모자 자헤디 장군은 숨어버리고 국왕 팔레비도 외국으로 달아나자 CIA는 쿠데타가 실패했다고 판단, 손을 떼기로 했다.

CIA 본부는 8월 18일 이란 지부장이던 커밋 루스벨트에게 전문을 보내 "작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므로, 우리는 미국이 배후로 밝혀질 수 있는 어떠한 작전에도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며 모사데그 제거 작전을 중단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아니,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지시를 무시했다. 이 사실은 이미 알려진 것이지만, CIA 본부의 중단 지시 전문 자체와 그 구체적인 지시 내용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이라고 포린 폴리시는 설명했다.

이튿날 CIA의 지원으로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임대" 시위대의 도움으로 군부 쿠데타가 성공, 모사데그는 투옥되고 친서방 팔레비 국왕이 전제 왕권을 되찾았다.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으로 이름을 바꾼 앵글로-이란 석유는 국유화됐던 유전을 되찾으려 했으나, 외국 자본으로 다시 넘어가는 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발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BP와 미국계 석유회사들은 이란 정부와 지분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작스 작전'은 이란의 자유주의자들의 숨통을 죄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포린 폴리시는 지적했다. 반서방 정서와 민족주의의 불길에 부채질을 한 셈이 돼 결국 1979년 미국 인질 위기와 팔레비 왕정의 전복 및 이슬람공화국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포린 폴리시는 모사데그에 대해 민주주의 가치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민주체제를 구축하려 하는 등 "이란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적인 지도자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로 널리 간주"되는데, 8.19 쿠데타를 고비로 이란에서 더 이상의 민주주의 발전은 좌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모사데그가 민주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에서 총리로 선임된 후 총리의 권력 강화에 나섰던 것에 대해 포린 폴리시는 "국왕의 권력을 줄임으로써 유럽형 정치 전통을 따르려 했던" 시도라고 해석했다.

미 국무부는 1989년 이란 쿠데타 관련 비밀해제 문건을 처음 발표했을 때 CIA의 개입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은 모두 삭제하는 등 CIA의 개입을 부인하는 입장을 오랫동안 견지해 왔으나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은 미국의 개입 사실을 인정했다.

이번 공개에 앞서 "CIA 전문 다수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거나 파기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포린 폴리시는 말했다. CIA의 공작 일선의 활동 방법을 공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쿠데타 지원에 합작했던 영국 정보기관을 보호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쿠데타가 성공이냐 실패냐의 기로에 섰을 때 쿠데타를 지원하는 거리의 시위대에는 모사데그 총리의 반대파 성직자 아야톨라 카샤니 세력이 총동원돼 참여함으로써 카샤니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카샤니는 당시 모사데그의 정적이었을 뿐 아니라 "쿠데타 전 과정을 거쳐 미국 측과 긴밀하게 교신하고 있었으며, 미국에 재정지원을 요청한 정황"도 새로 공개된 문건들을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고 포린 폴리시는 설명했다.

이슬람 성직자인 카샤니는 1950년대 이란의 주요 정치인 중 한 사람으로서 모사데그의 석유자원 국유화에 찬동하는 등 민족주의 동지였으나 모사데그와 갈라선 인물이다. 당시 이란 성직자들은 공산주의 투데당의 힘이 커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모사데그가 이에 대처하기엔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포린 폴리시는 말했다.

ydy@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6/21 16:2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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