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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한열을 사는 사람]⑥ "낫 품고 운구했다"…장숙희씨

송고시간2017-06-07 10:00

"경찰 시신탈취 우려해 민복 입은 허리춤에 광목 감싼 낫 숨겨"

유족 돌보고 장례준비위원 맡아…광주까지 '마지막 길' 동행

민복 차림 학생이 둘러싼 이한열 열사 영구차 [연합뉴스 자료사진]
민복 차림 학생이 둘러싼 이한열 열사 영구차 [연합뉴스 자료사진]

(고양=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그때 한열이 운구한 사람들은 모두 민복(民服)을 입혔어요. 상·하의 무명옷에 머리에도 흰 띠를 맸습니다. '상여니까 한국식으로 했구나'라고들 짐작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마지막 운구하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시신탈취를 걱정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종교부장이자 이한열 열사 장례위원이었던 장숙희(52·여)씨는 7일 경기 고양시 사무실에서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당시 운구를 맡은 사람들이 민복을 입은 이유를 털어놨다.

이는 정권의 시신탈취를 막으려는 필사의 행동이라고 그는 증언했다.

"장례 전에 모래내 시장 대장간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사서 광목천으로 감았습니다. 민복 입은 이들은 사실 허리춤에 그 낫을 하나씩 숨겨 차고 있었죠. 운구 행렬은 일부러 한열이가 있던 동아리 '만화사랑' 회원과 경영학과 친한 친구로만 꾸렸습니다."

이 열사 장례식은 당시 집권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표가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등을 수용하겠다고 밝힌 뒤 치러졌다. 그런데도 시신탈취 우려가 여전히 팽배했다.

실제 경찰은 장례식을 전후한 시위에서도 거리낌 없이 최루탄을 쐈다. 경찰은 시신 부검영장(압수수색 검증영장)도 발부받은 상황이었다.

장씨와 이 열사는 묘한 인연으로 현대사의 한 지점에서 마주쳤다.

사실 그는 1987년 6월 9일까지 '이한열'이라는 이름도 몰랐다. 얄궂게도 이 열사가 쓰러진 그 시위는 6월 10일 항쟁을 준비하는 의미 외에 장씨의 귀환을 환영하는 의미도 담겨 있던 시위였다.

장씨는 한 달 전인 5월 9일부터 총학생회를 대표해 호헌철폐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연세대 학생회관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다 단과대 학생회장단 등과 함께 연행됐고 곧이어 구속됐다.

재판에 넘겨질 뻔한 위기에 놓인 장씨는 6·10 항쟁을 앞두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고문을 당해 참혹하게 숨진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유치장에 있다가 검사 취조를 받으러 갔는데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방치하는 거예요. 무슨 일인지 몰랐는데 어떤 직원이 마치 우연히 그렇게 놓인 것처럼 무심하게 신문을 접어 내가 앉은 책상 앞에 내려놓더군요. 거기서 종철이 기사를 봤어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5월18일 박 열사의 고문치사사건 진상이 조작됐다고 폭로한 것이다. 파장을 우려한 검찰은 6월 초 학생들을 석방했다.

새로 공개된 1987년 이한열 열사 피격 직후 모습
새로 공개된 1987년 이한열 열사 피격 직후 모습

(서울=연합뉴스) 1987년 6월 9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당시 경영학과 2학년생이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은 직후,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 2학년생이던 이종창씨가 부축하고 있다.
네이선 벤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가 찍은 이 사진은 (사)이한열기념사업회가 19일 공개했다. 2017.5.20
[네이선 벤 제공=연합뉴스]
photo@yna.co.kr

이 열사가 경찰의 SY44 최루탄에 맞은 6월9일 시위는 다름 아닌 장씨를 비롯해 구속됐던 학생의 석방을 환영하고, 다음 날 항쟁을 준비하는 '구출 학우 환영 및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총궐기대회'였다.

장씨는 총학생회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400m 떨어진 교문 밖 시위현장에서 "경찰이 최루탄과 '지랄탄'을 콩 볶듯이 '딱딱딱딱' 쏘는 소리가 들렸다"고 회상했다.

시위 참가 학생이 최루탄을 맞고 응급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총학생회 집행부는 앞다퉈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이 열사는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이튿날 6·10 대회를 걱정하며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총학생회는 학생들을 반으로 나눠 교대로 병실을 사수했다. 그때부터 경찰이 환자를 빼돌릴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6·29 선언 이후 병실 사수대 숫자가 다시 절반으로 줄었다.

종교부장이던 장씨는 처음부터 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비롯한 그의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배 여사는 이 열사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 아들이 깨어날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격정을 토로하거나 분노를 표하지 않고 속으로 아픔을 삭이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장씨의 회상이다.

장씨는 끝내 '한열이'가 '이한열 열사'가 되고만 7월 5일부터 장례 준비 일도 맡았다.

"처음에는 장례식을 기독교식으로 하려고 했어요. 미션스쿨인 연세대 도움도 받아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장례준비위 회의 중에 백기완 선생님이 문을 와락 열면서 들어와서는 '장례식은 무슨 장례식이야. 개죽음에 멍석말이지'라고 일갈했습니다. 그 옆에 단발에 눈이 반짝반짝하는 이애주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때 기독교식으로만 장례를 치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이 선생님의 살풀이춤을 보고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를 느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한열 열사 마지막 길 동행한 장숙희씨
이한열 열사 마지막 길 동행한 장숙희씨

(고양=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6월항쟁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 종교부장과 이한열 열사 장례준비위원회 위원을 맡았던 장숙희(52·여)씨가 *****7일 경기 고양시 사무실에서 이한열 열사 기념 사진집을 보고 있다. 2017.6.7
comma@yna.co.kr

신학생이기도 했던 장씨는 장례식에서 예배와 설교의 비중을 짧게 압축적으로 구성하고, 대신 이애주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의 살풀이를 넣었다. 110만명이 모인 장례식에서 이 열사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의 한을 풀어준 춤은 그렇게 준비됐다.

장례식에서는 문익환 목사의 '열사 호명' 연설이 있었고, 뒤이어 배 여사가 "한열아. 한열아. 광주로 가자"며 오열했다.

장씨는 배 여사가 장례식장에서 입을 흰 상복도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아들과 동행하는 어머니를 위해 주단 집에서 한복 짓는 사람들을 불러 치수를 재고 한 땀 한 땀 맞췄다. 그는 "어머니가 입을 옷이지만 한열이 수의를 만드는 것처럼 정성을 들였다"고 말했다.

장씨는 장례식 이후 가족들만 탔던 운구차에 동승했다. 시청 광장과 이 열사의 모교인 광주 진흥고 노제를 거쳐 광주 선산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 열사의 마지막 길을 끝까지 동행한 셈이다.

배 여사는 이미 몸도 마음도 지친 상황이었지만, 장씨는 "어머니가 이 열사가 (장지에) 가서 누울 때까지는 쓰러지거나 긴장을 풀지 않고 계셨다"고 회상했다.

"광주 가는 길에 몇 번이나 보고 놀랐습니다. 고속도로가 보이는 언덕에서 어떻게 알고 나왔는지 시민들이 멀리 태극기를 흔들며 배웅하는 모습이 몇 번이나 눈에 띄었어요. 광주 톨게이트에 들어간 이후에는 아예 운구차를 에워싸듯이 해서 금남로로 갔습니다. 말로만 듣던 광주를 드디어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이한열 열사 하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한열 열사 하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배 여사는 해가 지기 전에 하관하기를 원했지만, 신촌 로터리에서 시청 광장까지, 시청 앞 노제 이후 다시 광주 진흥고 노제를 거쳐 장지까지 워낙 시간이 오래 걸린 탓에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장씨는 "대신 우리는 대낮같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하관하는 것으로 어머니 한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지금 대인관계 컨설팅 등을 하는 생활인으로 살면서 시민운동에도 참여하고, 중요 현안이 있을 때는 거리로 나서기도 한다. 2015년 시위현장에서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진 뒤 숨진 농민 백남기씨 사건을 보고서도 충격을 받아 백씨 시신이 있던 서울대병원을 찾기도 했다.

comm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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