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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메이지 정부, 원정 성매매 일본여성 50만명 관리했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일본은 한일 위안부합의를 고치려는 한국 정부에 긍정 의사를 보이면서 뒤로는 수정 불가 논리를 국제사회에 펴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7일 이탈리아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따로 만나 위안부합의를 지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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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정부가 2015년 타결한 합의를 준수하는 게 중요하다는 아베 총리의 발언을 듣고 구테흐스 총장은 합의를 지지하고 환영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베 발언은 위안부합의를 거부하는 한국인 정서를 이해한다고 문재인 대통령 특사인 문희상 의원에게 말한 지 열흘도 안 돼 나온 것이어서 합의 수정 전망을 어둡게 한다

일본은 "한일 합의는 피해자 명예회복, 배상, 재발 방지에 불충분하다"며 개정을 권고한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의 최근 보고서도 반박하는 공문을 유엔에 보냈다.

반박 공문에는 위안부 강제연행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고, 한일 합의가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개정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담았다.

일본 정부가 매춘사업에 관여한 것은 한국인 위안부 동원보다 앞선 19세기 후반부터다.

자국 여성이 세계 각지로 떼 지어 나가 원정 성매매를 하도록 지원하고 관리했다.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에는 위안부 모집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도왔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에 매춘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특수단체를 만들어 위안부 모집 광고를 내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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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인 여성조차 아무 거리낌 없이 성매매 현장으로 내몬 일본이 식민지 여성을 종군 위안부로 동원하는데 개입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우격다짐이다.

외국으로 나가 성을 파는 여성을 일본에서는 가라유키상이라고 부른다.

가라유키상은 14세기 포르투갈 등 유럽 선박이 드나든 나가사키와 구마모토 항구에서 처음 생겼으나 16세기 말부터 크게 위축된다.

천하 통일로 전국시대를 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여성이 인도 등지로 팔려나가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가라유키상은 메이지 정부 천황이 집권한 1868년 이후 부쩍 늘어난다.

이들은 중국, 홍콩,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등 아시아는 물론, 러시아 시베리아, 하와이, 아프리카 탄자니아 등으로도 나갔다.

대부분 빈민 출신인 가라유키상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모집했다.

먼저 제겐이라는 인신매매 브로커가 나선다.

제겐은 농촌이나 어촌 등을 돌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소녀들에게 일자리 알선을 미끼로 외국행을 제안한다.

이들이 동의하면 급여 선지급 등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부모에게 제공한다. 부모는 딸을 브로커 등의 처분대로 맡기겠다고 약속하는 증서에 서명한다.

주로 14~16세인 여성들은 이렇게 해서 선박에 몸을 싣는다.

외국에 도착하는 순간 감언이설에 속은 사실을 깨닫지만,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부모가 받은 선금은 물론, 브로커 수수료, 교통비 등을 전부 빚으로 떠안은 상태라 성매매를 거부할 수 없다. 돈 올가미에 걸려 성노예가 되는 것이다.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도 적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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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유키상 모집과 집단송출은 명백한 불법행위인데도 일본 경찰은 묵인했다.

서양 열강을 따라잡는 데 필요한 외화를 벌어주는 애국자라는 인식에서다.

일본은 제국주의 확장 정책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군인으로 비유해 가라유키상을 낭자군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1920년 성매매 금지 이전까지 가라유키상은 약 50만 명이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가라유키상은 일본군이 직접 관리하는 공창에 들어가거나 민간 집창촌 등에서 일했다.

공창에서는 일본 헌병이 매독 등 성병을 검사했다.

가라유키상 역사는 장기간 은폐됐다가 1972년 '산다칸 하치만 사창가'라는 책이 발간되면서 일반인에 알려지게 된다.

가라유키상 실태를 담은 이 책에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칼리만탄) 집창촌 사례가 자세히 소개됐다.

주로 서양인이 이용한 이곳에서는 가라유키상과 포주가 몸값을 절반씩 나눠 가진다.

승객을 가득 태운 배가 항구에 들어올 때는 일 인당 하룻밤 손님이 30명을 넘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뜸했다.

한 달 동안 손님을 20명 이상 받지 못하면 채무 상환과 생필품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다.

싱가포르에서는 일부 여성이 첩자로 활동하며 점령군이던 영국군 정보를 빼내 본국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정보는 일본군이 1941년 12월부터 두 달간 말레이반도를 놓고 영국군과 벌인 싱가포르 전투에서 완승하는 데 기여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귀국 후 끔찍한 차별과 천대를 받는다.

돈에 눈이 멀어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에서다.

1905년부터 중국 상하이와 싱가포르, 인도 뭄바이 등에서 일한 시마키 요시라는 여성은 귀국 후 주변 냉대 탓에 목숨을 끊었다.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서 여생을 마친 여성도 적잖다.

싱가포르와 홍콩, 말레이시아, 시베리아 등에는 가라유키상이 죽어 묻힌 묘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 속임수에 넘어가 몸을 팔다가 가족을 만나지도 못하고 외국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의 무덤이다.

이런 묘지에 안장된 여인은 그나마 낫다.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이나 성병, 폐병 등에 걸려 죽은 뒤 바다나 정글에 버려진 여인이 부지기수다.

가라유키상 당시 사진들(출처=daiki55.com)
가라유키상 당시 사진들(출처=daiki55.com)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전선으로 끌려간 종군 위안부도 가라유키상과 비슷하게 모집됐다고 일본은 주장한다.

민간 브로커들이 한국과 중국 등 식민지국 여성을 끌어모아 군대 위안소로 보냈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이 없었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군 위안소에서 성 노동을 거부하는 여성을 협박하고 폭행했다는 무수한 증언은 애써 무시한다.

일본 역사학회는 정부와 달리 양심적인 목소리를 낸다.

16개 일본 역사학단체는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해야 한다는 성명을 2015년에 발표했다.

강제연행은 많은 사료와 연구로 입증됐으며 당사자 의사에 반했다면 모두 강제연행으로 봐야 한다는 평가도 했다.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고 강제연행이 없었으며 법적 책임이 없다는 일본 정부 논리를 완전히 뒤집은 해석이다.

역사학계 성명은 사실분석을 토대로 나왔는데도 아베 총리에게는 마이동풍이다.

다만, 아베는 위안부합의 수정 가능성을 한국에 얘기하면서 국제사회에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한다.

역사 과오를 물타기 하려는 '국화와 칼' 전략이다.

아베가 칼을 뱃속에 숨긴 것을 모른 채 꿀을 바른 입만 쳐다본다면 대일외교는 첫 스텝부터 꼬일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당국이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hadi@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5/30 10: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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