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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조공외교' 조선 미녀들 중국 궁궐서 몰살됐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중국과 일본이 조공외교 논란에 휩싸였다.

먼저 일본 외교가 도마 위에 올랐다.

중국 관영 신문이 지난 2월 중순 일본의 대미 저자세 정책을 비판했다.

중국에 오만한 일본이 미국에는 무릎을 꿇은 듯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명나라 영락제가 데려간 권 씨 등 궁녀 8명은 참극을 겪는다
명나라 영락제가 데려간 권 씨 등 궁녀 8명은 참극을 겪는다

한 달 뒤에는 미국이 중국 대외정책에 시비를 걸었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공격수를 자임했다.

남중국해 주변국들을 조공국가처럼 대한다고 중국을 맹비난했다.

영유권 분쟁을 빚는 남중국해에 군사기지를 세우는 것을 겨냥한 발언이다.

조공은 약소국이 강대국에 고가 예물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한국 역사상 조공은 고구려와 신라에서 시작돼 고려 말 이후 성행했다.

조선 3대 왕인 태종과 아들 세종 당시 가장 잦았다.

조선은 명나라 신하국으로 편입된 탓에 조공은 의무였다.

조공은 일방적 상납이 아니라 교역형태를 띤다.

공물을 주고 답례품을 받는 방식이다.

말과 은, 사냥용 매, 인삼 등을 건네고 비단을 챙겼다.

이 때문에 양국 대외관계는 실리 외교라는 지적이 있다.

조선은 단순히 굴욕적인 조공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공 물자만 보면 무리한 평가는 아니다.

문제는 무수한 여성이 공녀로 희생됐다는 점이다.

서울 서대문구 영은문(현재 독립문)이 조공 잔혹사를 상징한다.

은혜로운 중국 사신을 영접한다는 뜻으로 세운 곳이다.

공녀 사신은 압록강 인근 의주에서부터 초호화 대접을 받는다.

정승급 관리가 안내하고, 주요 이동로마다 환영행사가 펼쳐진다.

[숨은 역사 2cm] '조공외교' 조선 미녀들 중국 궁궐서 몰살됐다 - 2

영은문에 도착하면 왕이 직접 영접한다.

왕궁으로 가는 길 주변은 비단이나 색종이로 장식하고 광대들이 춤을 춘다.

왕은 궁에서 사신과 맞절하고 명나라 황제 칙서를 수령한다.

상당수 사신이 조선 출신 내시인데도 왕은 깎듯이 예의를 갖춘다.

칙서를 가지고 온 사신이라고 해서 칙사로 불렀다. 칙사대접의 유래다.

1~2개월 걸리는 공녀 차출 기간에 전국 혼인 금지령이 내려진다.

딸을 둔 백성은 공포에 떤다. 13~25세 미혼녀가 선발 대상이다.

당사자들은 얼굴에 생채기를 내거나 뜸으로 헐게 하는가 하면 승려가 되기도 한다.

공녀를 피하려는 고육지책이다.

신체 훼손이 적발되면 중형을 받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다.

칙사에게 꾀병을 부리다 퇴짜맞은 여인의 부친이 관직 박탈이나 귀양 처벌을 받기도 했다.

예비 심사를 통과하면 명나라 복장과 화장 테스트를 거쳐 최종 선발된다.

영빈관에서는 왕과 왕비가 나와 환송식을 연다.

이때 친인척과 구경꾼은 울음바다를 이룬다.

황제 공녀와 별도로 칙사 개인에게 끌려가는 여성도 많았다.

이들은 명나라 고관대작의 성 노리개로 상납된다.

공녀는 태종과 세종 집권기에만 공식적으로 114명이 끌려갔다.

역할은 궁녀와 무수리, 요리사, 무희 등이다.

명나라 영락제가 데려간 권 씨 등 궁녀 8명은 참극을 겪는다.

권씨는 탁월한 미모에 중국어 실력을 겸비해 총애를 받았다.

권씨는 궁궐 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했으나 3년 만에 돌연사한다.

[숨은 역사 2cm] '조공외교' 조선 미녀들 중국 궁궐서 몰살됐다 - 3

이는 피바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동료 공녀인 여미인이 질투해 독살했다는 첩보 때문이었다.

영락제는 여미인을 불 고문으로 죽인다.

공녀 임씨와 정씨는 자살하고 황씨와 이씨는 처형됐다.

한씨는 당시에는 화를 면했으나 영락제 사망 때 순장됐다.

병에 걸린 최씨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공녀 8명 중 최씨만 살고 7명이 어린 나이에 모두 죽은 것이다.

독살설은 나중에 가짜로 밝혀진다.

명나라 궁녀가 여미인에게 동성애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데 앙심을 품고 무고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영락제는 무고 등에 가담한 모든 사람을 찾아내 처형하도록 했다.

이때 환관과 비빈 등을 합쳐 3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조공 사신의 횡포도 골칫거리였다.

요구 조건이 워낙 까다로워 뇌물로 달래야 했다.

1429년 칙사 귀국 때 뇌물 분량이 200 궤짝에 달했다고 한다.

궤짝 당 인부 8명이 따라붙었고 운반 행렬이 수 km에 달했다.

뇌물을 조달하느라 나라 곳간이 크게 훼손됐다.

사신단 수행원이 조선인을 때려죽이는 일도 있었다.

조공은 청나라 건국 이후 크게 완화됐다.

공녀는 건국 초기 32명만 받고 폐지됐다.

청나라 조공에서는 서양문물 유입 등 장점도 많았다.

힘을 앞세워 여성을 빼앗아간 '약탈외교'는 아니었다.

일본과 중국의 대외정책이 조공외교를 닮았다면 명나라보다는 청나라에 가깝다.

hadi@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3/30 09: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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