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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의 동행]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

(서울=연합뉴스) 경북 청송이 고향인 A(70) 씨는 나병이나 문둥병이라고 불리기도 한 한센병에 걸리는 바람에 한 많은 생을 살았다.

그는 아홉 살 때 한센병이 발병했다. 열네 살 때 치료를 위해 소록도에 들어가 2년 정도 살다가 경북 안동의 한센인 생활시설인 성좌원으로 옮겨 생활했다. 그곳에서 결혼했고 1967년 임신을 했다. 성좌원 측은 낙태를 권유했고 그렇지 않으면 시설에서 나가라고 했다. 결국 임신 8개월 상태에서 낙태수술을 받았고, 남편은 단종(정관절제)수술을 했다. 제대로 수술 도구가 갖춰져 있지 않은 탓에 수술과정에서 출혈이 심했다. 수술 후 10개월 동안 심한 고통을 겪었고 그 후로도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나중에 8개월 된 딸을 입양했지만 딸은 성장한 후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집을 나갔고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A 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기 위해 2013년 10월 변호사 면담을 할 때, "지금 와서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는다고 해서 제가 평생 고통받았던 삶에 대해서 보상이 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충남 논산 태생인 B(83) 씨는 아홉 살 되던 해부터 한센병을 앓았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마을에서 샘물도 이용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여수 애양원에 가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당시 한센병 환자는 차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애양원에 가기 위해 길을 걷던 중 같은 한센병 환자 어른들을 만나 익산 소생원에서 한센병 환자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따라갔다. 그곳에서 사랑하게 됐고 임신을 했다. 임신 6개월째에는 배가 불러서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1950년께 소록도에서 온 사람한테 강제로 낙태수술을 받게 됐다. 당시 수술방법이 매우 조악했기 때문에 후유증으로 평생 허리 등에 통증을 안고 살았다. 그도 4세 된 남자아이를 입양했지만 아이가 고교를 졸업한 후에는 연락되지 않았다.

A 씨와 B 씨는 이달 15일 한센인 단종·낙태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결로 각각 4천만 원을 받게 됐다. 대법원은 "원고들에게 시행된 수술 등은 위법한 공권력 행사"라며 낙태 피해자 10명에게 4천만 원, 단종 피해자 9명에게 3천만 원씩을 배상하라고 한 원심을 확정했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가족과 생이별하고 평생 멸시와 천대 속에 살아온 이들에게 뒤늦은 금전적 보상이 얼마나 위안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판결은 한센인들이 배상을 거부하는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 지 약 5년 만에 나온 첫 확정판결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런데도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데다 판결 하루 전 김정남 피살 소식까지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은 지울 수 없는 우리 현대사의 한 부분이다. 1심 판결문을 보면 한센병 환자 단종수술은 1915년께 일본에서 처음 실시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35년께 여수 애양원에서 먼저 실시된 후 소록도에서는 1936년께 부부 동거의 조건으로 단종수술을 내걸고 공식 도입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용 환자를 징계하는 차원에서 폭행, 협박, 감금과 함께 단종수술을 시행하기도 했다. 소록도병원에는 당시 상황을 담은 '단종대'라는 제목의 시(詩)가 지금도 걸려 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일제강점기에 이동이라는 한센인이 소록도의 감금실에서 출감하며 단종수술을 받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최재석 논설위원
최재석 논설위원

우리 사회에서 한센병 환자에 대한 냉대와 차별은 1970년대 무렵까지도 매우 심했다. 다른 전염병과 달리 한센병은 완치되고도 외모에 변형이 남아서 일반인들이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표출했다. 대부분 한센인은 발병 사실이 알려지면 마을 우물에서 물을 못 먹게 되고 밥도 같이 못 먹었다고 한다. 한동안 집에서 숨어지내다가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를 이기지 못해 몰래 마을을 떠나거나 쫓겨났다. 가족과 고향을 등진 한센인들은 폭행과 학대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구걸 등으로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결국에는 당국에 붙잡혀 소록도병원 등으로 강제이송되곤 했다.

근대 국가에서 '국가'의 본질은 폭력을 독점하는 기구다. 다만 그 폭력은 미리 공포한 법과 절차에 따라 행사돼야 한다. 국민은 국가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국가의 폭력 독점을 용인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한센인에게 단행된 수술은 그런 믿음을 저버린 '위법한 공권력 행사'였다.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잘못은 되풀이될 수 있다.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자꾸 들춰내야 하는 이유다. <논설위원>

bondo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2/21 10:56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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