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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전장을 누빈 전설의 종군 여기자들

(서울=연합뉴스) "피에 젖은 역사의 현장, 낙화 같은 젊은 죽음을 나는 너무도 많이 보았다. 내가 직접 손을 잡고 그 최후를 지켜본 병사도 있었다… 한 사람의 사병처럼 먼지와 땀에 절어 달리던 능선, 높은 재, 가파른 벼랑, 청정한 계곡, 우거진 숲 사이로 나는 잘도 뛰어다녔다. 젊은 연대장은 내가 지뢰를 밟을까봐 항상 지뢰탐지기를 가진 병사를 따라 보냈고 대대에 나가는 것도 말렸다. 그러나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언제나 최전방이었다… 나는 항상 영혼이 떨리고 흥분상태였으며 후방에 돌아와도 사흘을 넘지 못해 또다시 전선으로 출동했다…"

한국전쟁 당시 종군 여기자로 전장을 누볐던 장덕조(1914~2003)의 회고이다. '벽오동 심은 뜻은,''고려왕조 500년' 등으로 일세를 풍미한 역사 소설가 장덕조는 피난지 대구에서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평화신문 세 군데를 옮겨 다니며 군복 차림으로 종군을 했다.

1951년 7월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장덕조는 휴전회담을 취재한 유일한 여기자로 기록에 남아 있다. 종군기자 신분증을 발급받은 사람이 90명가량 됐는데 여성으로는 장덕조 한 명뿐이었다.

군복 차림으로 야전침대에 걸터앉은 모습의 장덕조. (가족 제공)
군복 차림으로 야전침대에 걸터앉은 모습의 장덕조. (가족 제공)

한국전쟁을 전 세계에 알린 종군 여기자는 단연 미국 기자 마거릿 히긴스(1920~1966)였다.

장덕조는 히긴스를 만난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히긴스라는 미국 여기자를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말갈기 같은 갈색머리를 더펄거리며 걷는 이 남자같이 키가 큰 여기자는 함께 '코피'를 마시면서도 말을 많이 하는 정력적인 여자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특파원이었던 히긴스는 1951년 한국전의 실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War In Korea'라는 저서를 펴내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히긴스는 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27일 서울로 들어와 한강인도교 폭파와 서울 함락을 직접 목격했다. 맥아더 최고사령관의 한강 방어선 시찰을 취재했으며 타자기와 칫솔만 지참한 채 미군의 후퇴행렬을 따라 내려가다 미군의 첫 교전이었던 스미스부대의 오산전투 패배의 현장을 보도했다.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초대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전선에는 여성들을 위한 편의시설(화장실)이 없다"는 이유로 히긴스를 일본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상급자인 더글러스 맥아더 총사령관의 조치로 전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히긴스는 7월 중순 복귀하자마자 최대 결전지였던 낙동강 전선으로 달려갔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 해병대가 북한군이 점령한 통영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통영상륙작전을 생생하게 전해 해병대의 용맹함을 전 세계에 알렸다. 히긴스는 용감한 한국 해병대를 "그들은 귀신도 잡을 것(They might capture even devil)"이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유명한 별칭이 생겨났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다. 미 해병대의 수송함을 타고 인천으로 향한 히긴스는 작전의 준비 과정, 상륙, 서울 수복 현장까지 동행 취재했다. 1950년 11월 12만 중공군에 맞섰던 미 해병대의 치열한 장진호 전투의 실상도 그의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1942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기자로 입사한 히긴스는 1944년부터 런던특파원, 1947년부터는 베를린특파원으로 근무하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 전 도쿄특파원으로 부임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1953∼54년 베트남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를 목격했다. 이때 히긴스 바로 옆에서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가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1955년 냉전이 한창이던 구소련을 취재했고 1961년 콩고내전의 현장에도 있었다. 1965년 베트남 여행 중 풍토병인 리슈마니아증에 감염되어 치료받다가 1966년 1월3일 45세로 생을 마감했다.

히긴스가 1950년 6월 29일 수원비행장에서 전선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맥아더 미군 총사령관과 단독 인터뷰하는 장면.
히긴스가 1950년 6월 29일 수원비행장에서 전선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맥아더 미군 총사령관과 단독 인터뷰하는 장면.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연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최초로 보도해 세기의 특종을 터뜨렸던 영국 여기자 클레어 홀링워스(1911~2017)가 지난 10일 홍콩에서 10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39년 8월 말 27세의 홀링워스는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입사 1주일 된 신참 기자였다. 그는 폴란드 남부에 파견되어 있었다. 당시 독일과 폴란드 국경은 봉쇄되고 외교 차량만 통행이 허용됐다. 홀링워스는 영국 영사관 직원의 차를 빌려 타고 독일 점령 지역으로 넘어가다가 탱크, 장갑차, 대포가 마대 가림막에 덮인 채 집결된 것을 발견했다. 독일군이 진격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폴란드로 돌아와 이 같은 상황을 기사로 송고했다.

사흘 뒤 나치의 침공이 시작됐다. 9월1일 이 탱크들이 카토비체의 자신이 묵고 있던 호텔 앞을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바르샤바 주재 영국 대사관에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현지 직원은 믿지 않았다. 홀링워스는 자신의 침실 창문 밖으로 전화기를 내밀고 탱크가 진격하는 소리를 직원에게 그대로 전했다.

1943년 연합군이 트리폴리를 점령했을 때 버나드 몽고메리 영국군 총사령관은 홀링워스에게 카이로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그는 종군 여기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홀링워스는 알제리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 쪽으로 옮겨가 활동했다.

베트남, 알제리, 중동, 인도와 파키스탄 등 20세기 주요 분쟁지역에는 홀링워스가 있었다. 1963년 이중간첩이었던 영국인 기자 킴 필비의 구소련 망명사건도 그가 밝혀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1946년 100여명의 사망자를 낸 예루살렘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사건 당시 그는 불과 300여m 떨어진 곳에 있었다. 1962년 알제리 독립운동을 취재하면서 프랑스 극우단체에 의해 처형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여성으로서 특별대우를 받는 것을 참지 못했다. 다른 여기자들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모두가 동등하게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는 1973년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초대 베이징 상주 특파원이 되어 미·중 수교를 지켜봤으며 1981년 은퇴하고 홍콩으로 옮겨와 생애 마지막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고령에도 홍콩 외신기자클럽에 날마다 나와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홀링워스의 사망 소식은 '전설적인 종군 여기자 시대'의 종말을 알린다. 오래전 전쟁터에서 종군 여기자들은 특이한 존재였고 죽음을 무릅쓴 취재 현장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기도 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깨고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훌륭한 기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전 세계 분쟁지역에서 여기자들의 존재는 이제 더는 특별하지 않다. 수십년 전 여성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놀라운 열정과 소명의식으로 용감하게 전장을 달렸던 여기자들, 홀링워스의 사망 소식은 이들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게 한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홀링워스가 2009년 8월 홍콩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홀링워스가 2009년 8월 홍콩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kej@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7/01/19 07:3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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