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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대의 마지막 붉은 별…역사가 된 피델 카스트로-1

1959년 친미 독재정권 무너뜨린 후 냉전시대 반세기 쿠바 지휘
미-쿠바 2014년 국교정상화 선언 등 역사의 전환기에 사망

(보고타=연합뉴스) 김지헌 특파원 = 미주 대륙 최후의 공산주의 국가를 밝히던 붉은 별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25일(현지시간)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반항아에서 변호사로 성장해 전 세계를 뒤흔든 혁명의 주인공이 된 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카스트로의 생전 모습
카스트로의 생전 모습사진은 왼쪽부터 카스트로의 1961년 4월29일, 2000년 4월6일, 2016년 2월13일 모습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수차례 투옥과 석방을 되풀이하며 쿠바 민중을 억압하는 정권에 맞서 싸운 그는 1959년 마침내 혁명에 성공, 쿠바의 정권을 잡으며 역사의 주역이 될 위치에 섰다.

냉전시대와 함께 한 통치 반세기 동안 소련과 미국이라는 양대 초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아프리카 등지의 군사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를 통해 그는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 쿠바를 제3 세계 해방운동의 중심으로, 국제정치의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

국내에선 1961년부터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로 대표되는 쿠바의 사회 체제를 설계해나갔고 쿠바의 정체성을 공산주의 이념만이 아닌 19세기 독립운동가 호세 마르티의 정신에서도 찾는 등 활로를 뚫어왔다.

1952년 체포돼 재판을 받을 때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고 외쳤던 카스트로는 그 자신 역사가 돼 20세기와 이후 세계의 조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생의 마지막 나날들에 미국과 쿠바가 냉전체제를 벗어나고 55년만의 관계정상화를 결정한 역사적 변곡점을 목격했다. 미국과 쿠바는 2014년 12월 국교 정상화를 선언했고, 2015년 8월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관이 재개설됐다. 올해 2월에는 양국간 정기 항공노선까지 재개통했으며 3월에는 쿠바에서 미-쿠바 정상회담이 88년만에 이뤄졌다.

2006년 1월22일의 피델 카스트로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2006년 1월22일의 피델 카스트로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 1926년 '반항아' 카스트로, 세상에 오다

1926년 8월 13일 쿠바 동부 비란에서 스페인 갈리시아 출신 군인으로 쿠바에 왔다가 정착한 앙헬 카스트로와 스페인 카나리아 제도 혈통으로 쿠바 피나르 델 리오 출신인 리나 루스 사이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라는 정식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피델 카스트로가 세상에 온 시점이다.

빈농의 아들이었던 앙헬 카스트로는 쿠바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한때 11만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임대하고 학교와 우체국을 제외한 주변 일대 모든 것이 그의 재산일 정도로 막대한 부를 일궜다.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보내던 피델 카스트로는 6살 때 산티아고 데 쿠바에 있는 가정교사 집으로 보내져 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에 대해 그는 부모님이 가정교사에게 내는 돈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해 반항심을 길렀다며 "나는 부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착취의 희생자가 됐다"고 기억했다.

2년 뒤 원하던 대로 가정교사의 집을 벗어나 기숙학교에 입학한 그는 운동과 등산에 관심을 쏟으면서도 학업 시험을 치면 곧잘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1945년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카스트로가 아바나대학에 입학해 학생 운동을 접하며 쿠바의 현실에 눈을 뜬 해로 기록된다.

그는 자신이 원래 "정치 문맹"이었으며 "재력가 아버지 덕분에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내가 가난한 수백 명의 아이보다 더 나을까"라고 되묻기도 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그는 당시 그라우 산마르틴 정권을 비판해 언론의 주목을 받는 등 쿠바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부패, 혼란상을 질타하는 쿠바 정치의 젊은 세력으로 도약했다.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카스트로는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을 탐독하며 사상적 토대를 굳히고 혁명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해갔다.

자서전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는 내게 사회가 무엇인지 가르쳐줬다"고 회고한 바 있다.

대학 시절 도미니카공화국,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남미 국가들에서 일어난 군사활동과 반란에 직접 참여한 카스트로는 혁명으로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은 카스트로와 쿠바의 운명은 점차 심화한 쿠바의 독재정권들과 결합해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1960년의 카스트로(왼쪽)와 체게바라(가운데)[AP=연합뉴스 자료사진]
1960년의 카스트로(왼쪽)와 체게바라(가운데)[AP=연합뉴스 자료사진]

◇ 1953년, 혁명의 잉태

1952년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체제 전복에 대한 카스트로의 의지는 더욱 커졌고 카스트로를 따르는 세력은 1천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식민지 시절 스페인군 병영을 공격해 독립의 기운을 일으켰던 19세기 선조들의 전례를 따라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26일, 산티아고 데 쿠바 외곽의 정부군 기지인 '몬카다 병영'을 공격했다.

다량의 무기를 확보해 빈농들에게 나눠줘 혁명에 동참하도록 하고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무기를 실은 차량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고 정부군 복장을 하고도 신발은 제대로 갖춰 신지 않는 등 공격은 처음부터 삐걱댄 끝에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허망하게 실패로 끝났다.

정부군에 체포돼 재판을 받으면서 카스트로는 최후 변론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La historia me abolvera)는 저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15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카스트로는 그를 지지하는 민중의 거센 석방 요구에 정부가 굴복하면서 약 20개월 만에 풀려나 멕시코로 몸을 피했다.

부농 출신으로 훗날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해 카스트로를 화나게 한 그의 첫 아내 미르타 디아스 발라르트의 집안이 석방 과정에서 힘을 써줬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카스트로가 망명지로 멕시코를 선택한 것 또한 역사의 한순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영원한 혁명의 동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만나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설명했고 체 게바라는 곧 이에 합류했다.

멕시코에서 세력을 모으고 군사훈련을 이어간 카스트로는 1956년 11월 25일 12인승짜리 하얀색 요트 '그란마'에 82명의 동지와 함께 올라타 멕시코 툭스판을 출항했다.

정원을 크게 초과한 배는 속도가 느려 예정한 닷새가 아닌 일주일 만에 쿠바 해안에 상륙했다.

거친 항해와 도착 직후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공격으로 피델과 라울, 게바라 등만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험준한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거점으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버텼다.

민중 다수의 지지를 얻은 카스트로 반군은 이듬해 1월 7일 정부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는 등 전세 역전에 나섰고 1958년 12월 31일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주하면서 마침내 혁명에 성공했다.

1959년 1월8일의 피델(가운데)카스트로와 반군들[AFP=연합뉴스 자료사진]
1959년 1월8일의 피델(가운데)카스트로와 반군들[AFP=연합뉴스 자료사진]

jk@yna.co.kr
(계속)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11/26 16: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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