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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광장에서 서울광장까지…광장은 '민심의 통로'인가

3·1 운동부터 6월항쟁까지 역사의 고비마다 '역할'
2002년 월드컵 이후 촛불시위 문화 정착…"광장 집회는 대의제의 실패" 지적도

(창원=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 [연합뉴스 자료]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 [연합뉴스 자료]

6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 '광장' 1961년 판 서문에 작가 최인훈이 쓴 글 일부다.

여기서 '광장'은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상의 의견들을 소통하는 '열린 공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광장이 처음부터 시민의 것은 아니었다. 이는 촛불집회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최근 창원시는 '관리 규정'을 이유로 창원광장 시국대회를 불허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시는 녹지 등 공공재산 보호를 이유로 창원광장 사용을 불법이라 발표했으나 시민단체는 헌법에 규정된 '집회·시위의 자유'에 반한다며 맞섰다.

서울시는 스케이트장 조성 공사로 서울광장 출입을 통제하겠다고 밝혔으나 다시 입장을 번복해 주말 대규모 집회에 광장을 개방하기로 했다.

역사의 고비마다 사람들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으나 '시민의 광장'은 아직 온전히 시민의 것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광장 민심'이 표출되기 시작한 시기는 4·19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인훈이 광장을 정치적 공간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이 1960년 4·19 혁명 직후 쓰였기에 가능했다.

해방 뒤 이승만 정권에서 중앙청 광장, 시청앞 광장 등 주요 광장은 주로 정부 주도의 관제행사가 열리는 곳이었다.

이 시기 광장 시위는 1958년 12월 서울역전 광장에서 돌발적으로 열린 1건과 1956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의 삼선 수락과 선거 출마를 요청하는 민중대회가 전부였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맞서 일어난 4·19 혁명도 전국 동시다발 항거였기에 엄밀히 따지면 '광장의 혁명'이 아닌 '거리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날 수많은 군중은 '민주주의 사수' 등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메웠다.

정부에 의해 동원되거나 통제된 관제 내지 친정부 행사가 아닌 열린 공간으로서 '광장'의 재발견이 이뤄진 것이다.

6월항쟁 [연합뉴스 자료]
6월항쟁 [연합뉴스 자료]

호헌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낸 6월항쟁의 주무대도 광장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은 5공 세력의 4·13 호헌조치,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폭로, 5월 27일 국민운동본부 출범이라는 숨 가쁜 행로 속에서 진행됐다.

이는 6월 26일 경찰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전국 38개 시·군에서 대규모 가두시위로 발전한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졌다.

광장의 열기가 절정에 이른 것은 7월 9일 치러진 이한열 민주국민장이었다.

이날 운구 행렬이 시청에 도착할 즈음엔 수만명에 이르는 인파가 시청 앞 광장에 집결했다.

이들은 경찰의 최루탄과 곤봉 세례에 흩어졌으나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장면으로 남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3·1 운동의 발흥지도 광장이었다.

1919년 고종 국장일에 백성들은 현재의 서울광장 전신인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 모여 망곡을 했으며 이는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3·1 운동 당시 일제에 대한 저항이 가장 격렬했던 곳도 대한문 앞 광장이었다.

3·1 운동은 4·19 혁명처럼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다. 그러나 당시 '기미이후(己未以後)'란 관용어가 생길 정도로 '우리는 하나'라는 민족 담론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4·19 혁명이나 6월항쟁의 광장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광장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시기는 2000년대에 접어든 뒤라고 진단한다. 그 이전의 광장은 현대적 의미가 아닌 그냥 '넓은 공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주한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효선·미순양 추모집회가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이때 한 누리꾼이 촛불을 들고나와 효선·미순양을 추모하자고 인터넷에서 제안한 것을 발단으로 광장 촛불집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선·효순이 추모집회 [연합뉴스 자료]
미선·효순이 추모집회 [연합뉴스 자료]

이후 2004년 이라크 파병·노무현 대통령 탄핵, 2008년 광우병 파동 등 굵직굵직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광장으로 모였다.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한홍구 교수는 "엄밀히 따지면 2000년대 이전까지 광장 집회는 가두집회, 거리시위에 더 가까웠고 표현문화도 지금과 달랐다"며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광장은 '동원된 군중'이 아닌 누구나 모일 수 있는 곳이 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광장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현재 한국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시민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오는 것으로 보인다"며 "소통이 안 되니 시민들이 뭉쳐 집단적 목소리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home1223@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11/26 07: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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