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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숙의 시각> 산업화·민주화 유산 탕진한 朴대통령

송고시간2016-11-24 07:31

<현경숙의 시각> 산업화·민주화 유산 탕진한 朴대통령 - 1

(서울=연합뉴스) 어느새 연말이다. '최순실 파동'으로 올해 가을은 실종된 듯했다. 비선 실세 파문이 블랙홀이 됐고, 우리 사회의 중요 사안들은 논의되지 못한 채 떠내려갔다. 미국에서는 인공지능 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현실화했다. 돌이켜보면 올해 세계는 정치 분야에서 유난히 충격적인 사건이 많았던 것 같다. 세계 언론들은 조만간 올해의 10대 뉴스를 선정할 것이다. '2016년 세계 10대 뉴스'는 뭘까. 얼른 5개가 떠오른다.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당선, 한국의 민간인 국정 농단 사태, 북한 핵실험이 그것이다. 독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인종 차별, 여성 비하, 폭력 옹호의 막말을 서슴지 않고, 윤리와 정의를 앞세우는 전통적 지도자와 거리가 먼 트럼프와 두테르테의 당선, 유럽 공동 발전이라는 대의를 부인한 브렉시트는 민주주의와 인류 지성의 진보 측면에서 역주행이라 할 수 있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최순실 파문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인의 국정 농락이 민주화·산업화에 성공한 한국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최 씨의 국정 개입은 봉건국가에서나 볼 만큼 전방위적이고 상상을 초월해 세계인들은 충격을 표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롱을 보냈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타임스는 최 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머릿속을 조종하는 내용의 만평을 실었다. 일본, 중국, 미국에서는 최 씨 사태가 연일 대서특필되고 있다. 북한은 올해 1월 4차 핵실험을 한 데 이어 9월에 5차를 감행했다. 한 해 두 번이나 핵실험을 했는데 6차 핵실험도 시간 문제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식된 것은 동북아시아 정세를 변화시킨 세계적 뉴스였다.

한국은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 권이지만, 이에 걸맞게 국제 정세를 주도해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한국 관련 사건이 10대 뉴스에 2개나 포함된다면, 그것 자체가 사건이다. 한반도에서 부정적인 대형 사건 두 개가 터진 것은 한국이 큰 위기에 처했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한국은 잠재 성장률이 떨어져 장기 저성장 늪에 빠져 있고, 가계부채가 1천300조 원에 달하고, 청년 실업률이 '고공 행진'을 지속하며, 북한 핵 위협으로 군사적 긴장이 높아졌다. 여기에 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국가 운영 체계가 마비됐다.

지난 22일 열린 국무회의는 한국이 처한 위기와 국정 난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를 요구하는 민심에 맞서는 것으로 보일까 두려워 회의에 불참했다. 황교안 총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불참한 박 대통령을 대신해 이 회의에 참석했으나 행사 개최국인 페루 부통령을 만났을 뿐 정상 외교다운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 최 씨 사태로 현실화한 외교 공백이다. 황 총리 부재로 이 국무회의는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주재했다. 유 부총리는 박 대통령이 김병준 책임총리를 지명할 때 경질됐다가 신임 경제부총리 내정자의 임명 절차가 진행되지 않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날 국무회의에서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안(GSOMIA)이 의결됐고 박 대통령은 같은 날 오후 이를 재가했다. 이 협정은 북한 핵 개발로 인해 필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야 3당을 비롯해 적지 않은 국민이 반대하고 있다. 여론 수렴 절차 없이 강행됐다. 이 협정 체결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진행됐다가 밀실 추진 논란에 휩싸여 무산됐다. '식물 대통령' 소리를 듣는 박 대통령이 이처럼 논쟁적인 사안을 '속전속결'로 처리한 것은 '최순실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보수 진영을 결집하려는 의도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향후 부작용이 없을지 우려된다.

박 대통령이 퇴진을 거부함에 따라 정국 교착 기미가 보인다. 야권이 박 대통령 탄핵 방침을 정하자, 대통령은 국회 추천 총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국회가 박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면 황 총리의 대통령 권한 대행 체제로 갈 가능성도 제기된다. 황 총리 대행 체제로 간다면 "이러려고 탄핵했나"는 자조가 나올 게 뻔하다. 김병준 책임총리 지명 때 이임식 일정까지 잡았던 황 총리가 국가 혼란을 수습하고 위기를 관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년에는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1987년 헌법이 제정된 지 30년이다. 얼마 전만 해도 대통령 중임제, 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으로 87년 체제를 시대변화에 맞게 바꿔보자는 논의가 활발했다. 그러나 87년 체제 30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매듭지어질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군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달성한 민주주의 유산을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 까먹는 방식이 된 것이다. 산업화 50년, 민주화 30년은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게 생겼다. 비전문가인 최 씨가 나랏일을 주무르는 사이 경제는 파탄 났고 민주주의는 붕괴했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최 씨 농단의 공범 내지 주범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국민 책임이 없지 않다. 약 20년에 이르는 박 대통령의 오랜 정치 활동에도 국민은 그의 실력을 보려고 애쓰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다. 그가 아버지처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줄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믿었다. 단지 그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주 행세를 하는 사람만 공주병을 앓는 게 아니다. 공주를 선망하는 이들도 공주병에 걸려 있다. 유권자가 이미지를 좇으면 정치인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선심정책을 좋아하면 현실성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인기 정책을 편다. 내년에 대선이 또 실시된다. 이 난리를 겪은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선택할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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