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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익산 백제유적, 무왕의 꿈이 서린 천년 고도

송고시간2016-11-14 07:30

(익산=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백제는 678년 동안 한반도 중부와 남서부를 중심으로 성장 발전한 고대국가였다. 패망의 아픔이 새겨진 탓인지‘백제가 중국 요서 지방에 식민지를 두었는가’, ‘백제에 일본은 어떤 존재였는가’, ‘무왕(600∼641)이 사비 시대에 익산 왕궁리 일대로 천도했는가’ 등의 궁금증을 일게 한다.

사진/전수영 기자
사진/전수영 기자

특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를 품고 있는 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사의 수수께끼로 가득한 곳이다.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라는 역사서에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무왕이 익산에 별도(別都)를 두었는지’, ‘익산 지역을 수도에 버금가는 도시로 경영했는지’, ‘왕궁리는 공주의 웅진성과 같은 사비도성의 이궁지였는지’ 등의 ‘익산 천도설’은 아직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왕궁리유적의 이봉수 문화관광해설사는 “왕궁리유적의 금마 일원은 지리적으로 노령산맥의 줄기가 뻗어 있고, 서남쪽으로 금강과 만경강이 흐르며, 작은 구릉들이 연이은 사이사이에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는 등 수도 입지 요건을 갖췄다”며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제 무왕 때 수도이거나 수도에 버금갔던 익산의 위상을 단적으로 알려준다”고 말한다.

사진/전수영 기자
사진/전수영 기자

◇ 백제 최대 가람으로 위용을 떨친 미륵사지

시인 신동엽이‘백제의 꽃밭’이라고 노래했던 익산 금마(金馬)의 익산 미륵사지(사적 150호) 입구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알리는 인증서 석비가 우뚝 서 있다. 미륵산(430m) 남쪽 자락에 위치한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광대한 꿈과 섬세한 예술혼이 느껴지는 사적지로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가람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지어져 조선 시대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보물 236호), 금당·승방·회랑 등 건물이 건립돼 있었음을 알려주는 초석들이 과거 화려했던 영화와 위엄을 짐작게 한다. 미륵사지 안내소의 김현아 문화관광해설사는 “ 옛 영화는 간데없고 아련한 흔적만 남아 있는 미륵사지는 선화공주와의 순애보로 알려진 무왕의 깊은 불심, 백제 문화의 융성을 담아낸 곳”이라며 “미륵신앙을 기초로 한 3금당 3탑의 가람 배치가 독특한 백제 최대 사찰 터”라고 설명한다.

당시 가람에는 동서 일직선상에 탑과 금당이 각각 3개소(동원, 중원, 서원) 있었다. 동(1993년 복원)·서(미륵사지 석탑, 국보 11호)로 석탑이,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자리했다. 승려의 생활공간인 승당은 백제 사찰의 특징인 ‘삼면승방’에 따라 사찰의 북·동·서측 삼면에 배치했고, 금당지 북측 가람의 중심축에 동서 방향으로 불법을 강의하던 강당을 두었다.

서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이 탑의 층수에 대해서 한때는 7층 설이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동탑지 주변 발굴에서 노반이 발견돼 9층이었음이 밝혀졌다.

사진/전수영 기자
사진/전수영 기자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콘크리트로 보수해 원래 모습이 크게 훼손됐다. 지난 1998년 구조안전진단 결과 탑의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돼 2001년부터 탑을 해체했으며, 2013년에는 탑을 다시 쌓아 올리는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현재 문화재청 등록 석공 등 전문가들이 2층 복원 작업을 하고 있는데, 누구나 자유롭게 복원 과정을 참관할 수 있다.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된 부재와 복원 과정을 둘러보다 보면 수많은 돌을 짜 맞춰 하나의 완벽한 조형물을 만든 백제 석공의 정 소리와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 중 2009년에 1층 심주석(탑의 중심축이 되는 돌)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 사리장엄구에서는 금제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 금제족집게, 은제관식, 금실 등 유물 9천700여 점이 수습됐다. 이들 유물 중에 금제사리호는 내외함(內外函)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주형(寶柱形) 뚜껑과 목이 긴 동체로 구성돼 있다. 동체는 상하 두 부분으로 분리되는데, 상하가 맞닿는 부분에는 돌려 끼우면 결합하도록 리벳이 설치돼 있다. 사리호 내에는 사리, 유리구슬, 금제화형구슬 등이 채워져 있었다.

사진/전수영 기자
사진/전수영 기자

또 가로 15.5㎝, 세로 10.5㎝의 금제사리봉안기는 백제 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탑을 조성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 내용을 담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미륵사지 발굴조사를 했다. 발굴 성과는 미륵사지 내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 왕도의 수수께끼를 품은 왕궁리유적

미륵사지에서 직선거리로 5㎞쯤 남측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사적 408호)은 용화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의 남측 끝 부분 해발 40m 내외 지점에 있다. 구릉을 깎아내리거나 낮은 곳은 흙을 쌓아 평탄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왕궁을 조성했다. 왕궁의 규모는 남북 490m, 동서 245m로 약간 틀어진 긴 네모꼴이다. 우리나라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을 쌓았다.

왕궁의 남측 전반부에는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 건물지를 비롯한 14개의 건물지가 있고, 북측 후반부는 정원석과 수목을 심어 정원과 후원으로 사용했으며 서북측 일부는 왕궁에서 필요한 귀중품인 금과 유리 등을 공급하던 공방지로 활용했다.

사진/전수영 기자
사진/전수영 기자

백제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왕궁리유적에 대한 발굴 작업은 1989년 시작해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백제 시대 귀중품인 금제품과 유리제품,‘수부’(首府)라고 도장 찍은 기와, 전달린 토기와 백제 최고 기술로 제작된 뚜껑이 있는 토기완, 백제와 중국의 교류 사실을 알 수 있는 중국청자편, 용변을 보던 변기형 토기, 금과 유리제품을 생산하던 도가니 등 유물 1만여 점이 출토됐다.

특히 공방지 주변에서 발굴된 대형 화장실은 토광을 파고 나무 기둥을 세우고 발판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내부에서 기생충 알과 현재의 화장지처럼 사용되었던 뒤처리용 막대기가 출토됐다.

왕궁리유적에서 지상에 남아 있는 것은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이 유일한데, 백제 왕궁의 경영이 끝나고 사찰로 변화되는 과정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1965년 보수작업 때 청동주칠도금 사리내·외함, 금강경판, 유리사리병, 청동여래입상 등 백제에서 고려에 이르는 여러 시기의 유물을 쏟아냈다.

사진/전수영 기자
사진/전수영 기자

이봉수 문화관광해설사는 “어떠한 연유로 해서 왕궁의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면서“무왕과 왕후가 사후 익산 쌍릉에 모셔짐에 따라 무왕과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라고 말한다.

왕궁리유적전시관에는 왕궁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금제품, 유리제품, 전달린 토기, 연화문 수막새, 금과 유리제품을 생산하던 도가니 등 발굴 조사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돼 있다.

백제 후기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지를 거닐며 백제의 잊힌 역사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 문화의 아름다움을 곱씹어 본다.

chang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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