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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호박 건네는 시골 할머니…냉정히 뿌리쳐야 하는 시골 교사

"고맙지만 사양할게요"…김영란법에 인심과 정(情)도 사라진다
관공서·병원·학교 음료수 한병도 사절…촌로 챙겨온 농산물 돌려보내

(전국종합=연합뉴스)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 2주가 지났다.

이 법은 사회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접대 문화가 사라지면서 일반적인 저녁 약속이나 술자리도 눈에 띄게 줄었다. 경조사 역시 검소해졌다.

허용·금지의 범위가 명쾌하지 않아 일부 혼란도 있지만 깨끗한 사회로 가는 과정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김영란법이 사회 전반에 지나친 경직성을 가져와 법 취지와 무관한 전통적인 인정 문화까지 부정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정(情)에 의존해왔던 농촌지역 사회에서는 그 변화의 충격파가 더욱 크다.

늙은 호박 건네는 시골 할머니…냉정히 뿌리쳐야 하는 시골 교사 - 1

◇ 고맙다고 건네는 음료수 한 병도 거절…무안당하기 일쑤

충북 옥천군 군북면에 사는 임계호(85) 할아버지는 매월 한 차례 옆 마을에 있는 보건지소를 찾는다.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 상태를 체크하고, 한 달 동안 먹을 약도 받기 위해서다.

언제나 받기만 하는 게 마음에 걸렸던 그는 이달 초 약을 받으러 가면서 큰 맘 먹고 1만원짜리 비타민 음료를 한 박스 샀다.

그러나 손녀뻘 되는 직원들에게 음료 상자를 전해주려던 그의 손은 금세 무안해졌다. 직원들이 김영란법을 문제 삼아 한사코 받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도 김영란법의 취지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할아버지뻘 되는 촌로의 순수한 성의까지 받아주지 않는 건 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전북 고창군의 한 초등학교 교사 A(38·여)씨는 최근 방과 후에 학교를 방문한 B(77) 할머니를 되돌려보낸 뒤 미안함에 한참이나 교실을 떠날 수 없었다.

조손가정이 많은 시골 특성상 손주를 가르쳐준 보답으로 약간의 농작물을 가져오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러 있다.

예전엔 마지못해 받았지만 이날은 김영란법 때문에 B할머니가 보자기에 싸온 늙은 호박 한 개를 한사코 사양했다.

A씨는 "법에 걸리니 큰일 난다. 대신 아이는 제가 더 잘 챙기겠다"고 말했지만, "호박이 무슨 뇌물도 아닌데…"라며 서운해하며 쓸쓸히 돌아선 B할머니의 뒷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무거웠다.

김영란법을 적용받는 대학병원 임직원들도 환자가 주는 음료수나 빵 등 '호의'를 받아주지 못한다. 환자가 보살펴 줘서 고맙다고 건네는 음식물 역시 '직무 관련성 금품'이어서다.

울산대병원은 최근 각 병동 게시판에 환자에게 받는 음식물은 무조건 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고지했다.

하지만 이를 잘 모르고 빵 등을 건네는 노인 환자들을 설득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일부는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다며 역정을 내기도 한다.

한 간호사는 "음식물을 받지 않으면 무안해 하는 환자들 때문에 난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똑같은 간호 업무인데 일반병원은 예외로 인정해주고, 대학병원만 법 적용을 받는 것을 비롯해 선뜻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경찰 조직 역시 사건처리에 감사하다고 민원인이 음료수를 챙겨 오면 곧바로 되돌려 주거나, 경찰서 내 청문감사실에 보고해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진 상태다. 작은 정성을 주고받는 정(情)까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지만 어느 누구도 민원인이 건네는 음료를 감히 받아들지 못한다.

늙은 호박 건네는 시골 할머니…냉정히 뿌리쳐야 하는 시골 교사 - 2

◇ 주민화합행사도 위축…동네 선후배 사이 공무원·이장 따로 식사

지역 고유행사와 이통장협의회와 같은 관변단체 활동에도 상당한 위축을 가져왔다.

강원 태백시의 C동장은 지난 1일 열린 태백제 행사를 앞두고 지역 유지로부터 "미안하다"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태백제는 태백시의 8개동 주민들이 모여 체육활동을 즐기는 화합 축제다. 그동안 행사 때마다 지역 유지들이 자발적으로 음식이나 격려금을 후원했는데 올해는 김영란법 때문에 어렵다는 게 지역 유지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춘천시 서면이장단협의회는 최근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어 오는 12일 개최하려던 '제15회 서면인의 날 행사'를 취소했다.

매년 1천500∼2천여명이 참여하는 춘천 최대 주민화합 행사인 만큼 후원과 경품 등이 푸짐한 데 자칫 김영란법 위반 소지가 부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서면이장단협의회 관계자는 "이장단협의회가 이권단체도 아닌데, 명확하지 않은 규정 때문에 뜻깊은 행사를 못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관변단체 회의 현장에도 '서먹한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도농복합도시인 경기도 파주시는 월 1회 읍·면·동별 이통장협의회를 여는데 D동장은 지난 5일 회의가 끝나자마자 이통장들과 간단한 인사만 나눈 뒤 곧바로 퇴근했다.

전달까지만 해도 회의가 끝나면 회의수당(3만원)을 걷어서 저녁을 함께 먹으며 지역 현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김영란법 때문에 저녁 자리가 부담스러워져 아예 함께하는 자리를 피했다는 게 D동장의 전언이다.

한 통장은 "공무원과 주민이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는 방식이 회의만 있는 게 아닌데 법이 소통 창구를 막아 버렸다"며 "이러면 공무원과 주민이 사무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고 불만을 내비쳤다.

늙은 호박 건네는 시골 할머니…냉정히 뿌리쳐야 하는 시골 교사 - 3

◇ 후원금 감소에 일일찻집 열어 운영비 마련한 야간학교

일부에서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름의 자구책을 내놓기도 한다.

강원도 춘천에서 30년간 맥을 이어온 예맥야간학교는 지난 8일 학교 강의실에서 일일찻집을 열었다. 예년에 없었던 행사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기부문화가 위축된 탓에 운영비 마련을 위한 '고육지책'이다.

예맥야간학교 관계자는 "매년 지방자치단체 지원금도 줄고 있는데 김영란법으로 부정기 후원금도 줄어드는 분위기라 그 대안으로 어렵게 일일찻집을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구시 달성군의 사회복지 공무원 E(29·여)씨는 요즘 물통을 꼭 챙겨서 다닌다.

김영란법 이후 물 한 잔도 얻어 마시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갖자는 의도에서다.

E씨는 "야박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부담스러웠던 민원인의 선물을 거절할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한다"며 "대신 그런 미안함을 담아 민원인들을 더 챙겨드리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감사 부서에서는 일상적인 직무수행이라면 법에서도 허용하는 만큼 좀 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한 지자체 기획감사실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인 판례 등이 없는 상태에서 구설에 오를 걸 걱정하는 분위기 탓에 인간미가 사라졌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 같다"며 "법 시행 초기가 모두가 조심스럽겠지만 원활한 직무수행을 위해 3만원 이하의 식사 정도는 허용되는 만큼 대인 관계에 문제가 생길 만큼 행동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김선형·노승혁·박철홍·이상현·이은중·임보연·전창해·홍인철)

jeonch@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10/11 07: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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