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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1년> ⑨위안부 피해 할머니 "끔찍한 역사…치떨리고 분해"

송고시간2016-08-14 09:00

"내 일생 망친 일본 용서 안 돼…배상 꼭 받고 싶어"

"피가 쏟아져 온몸이 망가지면 파묻고…그게 30만명이나 된다니..."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그 사람들이 전쟁에서 이기려고 한국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열다섯 열여섯, 많아야 열일곱 살 아이들을 데려다 몹쓸 짓을 했는데…그 생각을 하면 치가 벌벌 떨리고 분하고 억울해요."

서울 용산구에 사는 위안부 피해자 A(88) 할머니는 지난 12일 자택에서 이뤄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평생 가슴에 담아놓은 울분을 터뜨렸다.

주름 하나 없는 깨끗한 모시옷을 입고 짧은 머리를 흐트러짐 없이 빗어넘긴 단정한 자태의 할머니는 말에 힘이 있고 조리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동안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숨기며 살아왔다. 1993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은 했지만, 주변에는 계속 숨겨왔고 공식 석상에 나온 적도 없다. 그러다 지난해 말 위안부 한·일 합의 이후 일본 언론의 방문으로 처음 인터뷰를 했고, 국내 언론매체로는 연합뉴스와 처음으로 만났다.

기자가 "광복절을 앞두고 할머니께 이런저런 일을 여쭈러 왔다"고 하자 할머니는 더 묻기도 전에 고향인 함경도 사투리로 한평생 쌓아온 한(恨) 서린 이야기를 쏟아냈다.

"남자는 징용도 갈 수 있어요. 군인도 갈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 어린 여자를 데려가니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이야…부모 가슴에 칼을 박았죠. 한국사람 가슴에 칼을. 어린아이가 끌려가서 그런 몹쓸 짓을 얼마나 당했으면 자궁이 터지겠어요. 소가죽도 쉽게 터지는데, 그 엷은 살이 안 터지고 배기겠어요. 피가 쏟아져서 온몸이 망가지면 데려다 파묻고, '아야, 아야' 몇 번 아프다고 하면 파묻고. 그게 30만 명이 됐다 하니 얼마나 기가 막혀."

할머니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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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삼수군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5남매 중 장녀로 사랑받으며 별 어려움 없이 컸다. 고래등 같은 큰 집에는 걸인들이 늘 와서 밥을 먹고 갈 정도로 살림이 넉넉했다. 그랬던 할머니가 난데없이 지옥으로 끌려간 건 열일곱 살 때였다.

"어느 날 해산 시내로 심부름을 가는데, 큰 칼을 찬 일본 순경이 나를 보더니 땅바닥에 앉으라고 해요. 그때도 내가 몸집이 작고 약했으니까 무서워서 바로 무릎 꿇고 앉았어요. 그러자 그 순경이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은 발로 두 번을 내 허벅지를 콱콱 밟는 거야. 너무 아파서 앞으로 엎드리니까 궁둥이를 또 몇 번을 밟았는지 몰라요. 오줌을 막 쏟으면서 끌려갔지. 그렇게 중국을 가는데, 기차역에 가니까 (여자를) 많이 잡아다 놨어요. 나중에 뉴스에서 보니 여자들을 한 번에 1천 명씩 싣고 갔다고 하더라고."

1944년 봄 중국 만주의 군부대 위안소에 끌려간 할머니는 이듬해 봄까지 1년 동안 그곳에 있었다. 할머니는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잠시 침묵했다.

"거기에 한국사람이 군인을 따라다니는 사진쟁이랑 통역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후퇴하는 것 같다면서 트럭에 짐을 막 싣더라고. 그래서 내가 도망쳤어요. 참 운이 좋게 어떤 사람이 나를 옷을 갈아입히고 도와줬어요. 기차에 태워서 나를 해산 시내까지 보내줬지. 그렇게 와서 고모 집에 가서 두 달을 숨어있다가 해방이 돼 고향 집에 갔죠. 어머니에게는 그냥 중국에 끌려갔었다고만 했어."

심부름하러 나갔던 소녀는 그렇게 1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부유했던 집안은 일제에 의해 풍비박산이 났다. 독립운동에 가담한 할아버지가 일본 경찰에서 고문을 당한 끝에 몸을 못 쓰게 됐고, 군청에서 일하던 삼촌은 일본군에 징발돼 전쟁에서 숨졌다. 오빠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었지만, 독립운동 관련 책을 갖고 있다 적발돼 경찰에 끌려가 매를 맞다 숨졌다. 할머니는 오빠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발가벗겨진 채 고무 채찍으로 무참히 맞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할머니의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인 열여덟 살에 일본에 징용 갔다 돌아온 열 살 위 남편과 결혼했다.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였고 남편은 열 살이나 어린 아내를 아껴줬다. 그러나 행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1·4 후퇴 때 남편은 할머니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할머니는 친정 식구들과 생이별했고 이후로 다시는 부모와 형제들을 보지 못했다.

서울에 정착해 살던 할머니 부부는 금실이 좋은 편이었지만, 할머니는 아이를 갖지 못했다. 미8군에서 일하던 남편은 그곳에서 만난 여인과 사내아이 둘을 낳았다. 할머니는 남편이 데려온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길렀다. 아들 둘은 장성한 뒤 미국에 이민을 갔다.

1993년 할머니에게 더 큰 아픔이 닥쳤다.

그해 정부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피해자 등록을 받았다. 그동안 피해 사실을 숨겨온 할머니는 남편 몰래 등록을 했다. 그런데 얼마 후 관련 단체에서 할머니 집으로 보낸 편지가 남편 눈에 띄었고, 할머니는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영감이 이혼하자고 해서 법원에 가서 이혼했어요. 하도 억울하고 분하니까 신경통에 걸렸어요. 한참 아팠지. 그런데 이혼하고도 영감이랑 같이 살았어요. 영감이 화가 나서 이혼하자고 했지만, 자기도 혼자고 나도 혼자고, 아이들도 미국 가고 했으니까."

남편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는 완전히 홀로 남았다.

할머니는 일본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용서할 수 있겠소? 내 일생을 망쳤지, 삼촌이랑 오빠를 죽였지, 할아버지를 병신 만들었지. 그리고 내가 영감한테 대우를 받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억울하고 분하고…."

하지만 할머니는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에는 대체로 긍정했다.

"그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사과하려면 우리가 요청하는 대로 돈을 다 줘야 하는데, 그 사람들 절대 안 해요. 일본사람들은 계속 안 한다고 했는데 미국사람들이 '한·일 회담하려면 걸림돌을 제거하라' 해서 이번에 합의한 것 같더라고. 아니면 할머니들이 국제 재판을 걸겠다고 하니까 그런 건지…. 어쨌든 이전까지 돈을 벌러 간 거라고 매도하던 아베 총리가 인정했잖아. 일본이 잘못했다고 하고 돈을 많건 적건 낸다고 하니까…전에 일본에서 누가 나와서 한국사람한테 몹쓸 짓 했다고 사과한 적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돈을 건네지 않으니까 완전한 합의가 안 됐잖아요. 그래서 난 이번에 잘 됐다고 생각해요."

할머니는 일본에서 보낸 배상금을 받아 남은 생이라도 편하게 보내고 싶다고 했다.

"지금 집이 사글세인데, 전세를 얻어 나가고 싶어요."

할머니가 지금 사는 집의 월세는 50만 원이다. 여성가족부는 법에 따라 할머니에게 매월 126만 원을 생활안정지원금으로 지급하고 관할 지자체인 서울시도 월 70만 원씩 지원한다. 또 정부 지원으로 얼마 전부터 간병인이 할머니 집에서 함께 지내며 돌봐주고 있다.

그래도 할머니는 생전에 배상금을 받고 싶다고 했다. 가해자에게서 어떻게든 배상을 받아내야 악몽의 두께가 조금이라도 얇아지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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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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