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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무단통치 원흉' 아카시 헌병대사령관 서한 최초 공개

송고시간2016-08-11 11:16

독립운동사硏 12일 공개 행사…무단통치 구상을 밝힌 실증자료


독립운동사硏 12일 공개 행사…무단통치 구상을 밝힌 실증자료

(천안=연합뉴스) 김용윤 기자= 일제의 의병탄압과 무단통치 근거를 밝힐 수 있는 일본군 '한국주차헌병대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의 친필서한이 광복 72주년을 앞두고 공개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12일 독립기념관 자료실에서 공개할 아카시 친필 서한은 가로 11.17m, 세로 18㎝ 크기의 두루마리 형태로 배접된 장문의 일본 고어 초서체 문건으로 독립운동사연구소가 올해 초 일본 교토의 한 개인연구가로부터 입수했다.

일제 '무단통치 원흉' 아카시 헌병대사령관 서한 최초 공개 - 2

1910년 경술국치 전후 한국민 강권탄압을 주도한 아카시의 무단통치 정책의 핵심 주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본질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자료다.

서한은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8월 3일 아카시가 후임자로 임명된 사가키하라 쇼조에게 보낸 것으로, 자신이 2년간 재직한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한국 지배를 위해 이른바 정책을 조언하는 내용이다.

의병 탄압을 마무리하고 식민통치 기반을 구축하려면 한국주차헌병(이하 헌병)이 조선반도의 치안권을 장악, 곧 헌병경찰제 시행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박민영 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아카시는 약 8년간 일제 헌병총수로서 의병을 탄압하고 무단통치를 총지휘한 악명높은 인물"이라며 "그의 친필로서 일제의 통치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실제로 그의 아이디어는 1910년 데라우치 총독 부임 이후 그대로 실현됐다"고 밝혔다.

아카시는 서한에서 '불측한 (식민지) 백성을 제어하고 분쟁과 소요의 화근이라 할 수 있는…(중략)… 이 새로운 보호국에서 군도의 광채와 다갈색을 싫어하여 보통의 경찰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문관 기질은 배제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만약 헌병이 경찰의 전권을 장악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오히려 헌병은 일종의 식민지병이 되어 통감의 휘하를 벗어나야만 한다. 통감이 헌병을 경찰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헌병이 통감에 부속될 이유는 전부 소멸하게 된다. 요컨대 한국에서 헌병이 순사를 아우르고 경찰의 전권을 차지할 필요가 있다"며 헌병의 권한 확대를 위해 '헌병대장' 직위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헌병대사령관'으로 직함을 승격할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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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는 1907년 10월 한국주차헌병대장으로 부임해 왕산(旺山) 허위(許蔿) 의병장을 직접 신문하는 등 의병탄압에 앞장서고 이듬해 12월에는 일제 침략군인 이른바 한국주차군의 참모장을 겸직했다.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6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한국 통감으로 부임, 헌병대를 헌병대사령부로 확대 개편할 때 초대 헌병대사령관이 돼 무단통치의 기틀을 다졌고 1914년 4월까지 재임하며 한민족의 암흑기를 철저하게 강요했다.

그는 특히 '기포성산(碁布星散, 바둑판 포석과 하늘의 별처럼 헌병을 총총히 배치함)' 탄압방식으로 악명을 떨친 뒤 1918년 대만총독으로 부임, 이듬해 죽었다.

yy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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