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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공부보다 예(禮) 우선하는 정신 되새긴다

송고시간2016-08-12 07:30

(영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서원은 조선 시대 성리학 사상의 본거지이자 인재를 배출한 요람이었다. 성균관이나 관학인 향교와 달리 16세기 이후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사림은 성리학적인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삼았고 성리학을 체계화한 주자를 큰 스승으로 섬겼다.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은 1542년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회헌 안향(安珦·1243∼1306) 선생이 공부했던 숙수사 터에 사당을 짓고 이듬해 주자가 강학한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주세붕은 목사 안휘에게 보낸 편지에서“이곳은 문정공 안축이 죽계별곡을 지은 곳으로 마치 신령한 거북이 엎드린 듯한 형상으로 산 아래에 죽계가 있으며, 구름에 둘러싸인 소백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 등 진실로 산수풍광이 백록동서원이 있는 중국의 여산에 못지않다”면서 “구름과 산, 언덕과 강물, 그리고 흰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감히 이곳을 ‘백운동’이라 이름 짓고 감회에 젖어 배회하다가 사당 건립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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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선생이 백운동서원의 격을 높이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편액과 토지를 내려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자, 1550년 명종(明宗)은 친필로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과 함께 서적과 노비를 하사했다. 왕이 현판을 내렸다고 해서 이를 사액(賜額)서원이라고 하는데, 백운동서원은 이때부터 소수서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소수는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 즉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는 말에서 유래한다.

조선 500년을 관통하는 유학 이념이 녹아있는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은 인재 양성뿐만 아니라 시정을 비판하는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면서 널리 퍼져 1개 도의 서원이 80∼90곳을 헤아리게 됐고, 사액서원도 130여 곳에 이르렀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난립한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 미국의 하버드대학보다 무려 93년 먼저 설립된 소수서원은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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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이자 사립대학

서원이 관학인 향교와 달리 마을과 떨어져 주변 풍광이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곳에 있듯이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도 낙동강의 원류를 이루는 죽계수가 감돌고 바위와 울창한 송림이 한데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빚어내는 절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중앙고속도로 풍기나들목에서 나와 931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사적 제55호)에 닿는다. 소수서원으로 들어서는 매표소 입구부터 300∼500년 된 소나무 숲이 반긴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로 학자수(學者樹)라고 부른다.

소나무 내음을 따라 걷다 보면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당간지주(보물 제59호)를 만난다. 당(幢)이라는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이를 고정시켜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박석홍 전 소수박물관장은 “소수서원 자리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라는 큰 절이 있던 터였고 안향이 숙수사에서 수학해 과거에 급제했다”며 “세조 3년 단종 복위운동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폐부될 때 소실되고 유일하게 당간지주 1기만 남았다”고 말한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암수한몸인 은행나무 고목과 향사 전날 제물들을 위에 올려놓고 제관들이 그 생김새와 흠집을 살피며 제물로서 합당한지 검토하던 성생단(省牲壇)이 나타난다. 서원의 성생단은 사당 근처에 있는 것이 관례인데, 소수서원의 성생단은 서원 입구에 있다. 또 서원 영역으로 들어가기 전 오른쪽에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아주 소박한 정자가 문 앞에 앉아 있다. 주세붕이 세운 정자로 유생들이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정자의 이름은 중국 북송의 유학자 염계 주돈이의 호에서 ‘염’ 자를 따오고, 높인다는 뜻에서 ‘경’ 자를 붙였다고 한다. 죽계수가 내려다보이는 경렴정의 현판은 조선 3대 초성(草聖)으로 불리는 황기로가 썼는데 마치 용이 비천하는 듯한 빼어난 글씨로 평가받는다.

경렴정을 지나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으로 들어서면 강학당(講學堂, 보물 제1403호)과 마주한다. 지도문은 표적을 향해 활을 쏘듯 도를 향해 뜻을 세우고 나아감을 이르는 말이고, 강학당은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곳이다. ‘백운동’ 현판이 걸린 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의 4칸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1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문을 들어 올려 처마에 걸면 탁 트인 마루가 되고, 건물 사방으로 너비 1m 정도의 툇마루가 빙 둘러 연결돼 있다. 대청에는 ‘소수서원’ 편액이 높이 걸려 있다. 박석홍 전 관장은 “소수서원은 엘리트 유생들의 수학 공간만은 아니었다”면서 “퇴계는 배움을 열망하던 순흥 땅의 무쇠장이 배순을 제자로 삼아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유교무류(有敎無類)를 몸소 실천했다”고 설명한다.

강학당 뒤로는 원장의 집무실 겸 숙소인 직방재와 일반 교수의 집무실 겸 숙소인 일신재가 배치돼 있는데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직방재바로 옆에는 서적과 서원에서 출판한 판각을 보관했던 정서각이 있다. 서책은 ‘좌우지선’(坐右之先)의 예를 따라 으뜸자리에 둔다고 스승의 우측에 세웠고,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어제(御製) 내사본’을 비롯해 3천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장서각 앞에는 밤에 서원 경내를 다니는 데 지장이 없도록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관솔불을 켜 놓았던 정료대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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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효예학이 살아 숨 쉬는 선비정신의 산실

일신재 오른편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자리하고 있다. 소수서원은 1888년까지 350년간 무려 4천200여 명의 유생을 배출했는데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소수서원 출신이다.

일명 동몽재라고 불리는 학구재는 ‘학문을 구한다’라는 뜻을 가진 건물로 정면 3칸 중 1칸이 마루로 구성돼 있다. 중앙에 있는 마루의 앞과 뒤는 벽이 없이 모두 개방해 놓았다.‘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을 담은 지락재는 ‘높은 곳을 우러러보는 공간’이라 하여 ‘앙고재’라고 부르는데, 학구재와 똑같이 3칸 규모이지만 마루가 오른쪽으로 두 칸이 나 있다. 지락재의 마루에서는 바로 옆 담장 너머 죽계천의 풍경과 계곡 물소리가 한가득 담긴다.

박석홍 전 관장은 “학구재와 지락재는 직방재와 일신재보다 기단 높이도 낮고 한 자 낮게 뒷물림돼 지어져 있는데, 이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공경의식이 건축에도 반영됐기 때문”이라며 “학구재와 지락재는 ‘工’ 자 형태로 지어졌는데 ‘工’은‘공부’(工夫)의 앞글자인 ‘공’을 따온 것으로 유생들의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대로 소수서원은 충효예학이 살아 숨 쉬는 선비정신의 산실이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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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원 대부분이 중국을 본받아 전학후묘(前學後廟)로 학문을 갈고닦는 강학 영역을 앞쪽에, 제사를 지내는 제향 영역을 뒤쪽에 배치한다. 하지만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전통 위차법(位次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라 동학서묘(東學西廟)다. 강학당 옆쪽에 담장을 둘러서 별도의 구역을 이룬 곳에 문성공묘(보물 1402호)가 있다. 이곳에는 문성공 안향 선생을 주향으로, 문정공 안축과 문경공 안보를 배향한 뒤 문민공 주세붕을 추배해 4명의 위패를 봉안했다. 대부분의 사당을 ‘사’(祠)라 칭하지만 임금이 인정한 특정한 사당만을 ‘묘’(廟)라 칭한다. ‘묘’로는 역대 임금들을 모신 종묘, 공자를 모신 문묘가 있다.

문성공묘 뒤편에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던 전사청이 있다. 전사청 바로 옆 영정각에서는 주희, 안향, 주세붕, 이원익, 허목, 이덕형 등 6명의 선인 초상과 만난다. 안향의 초상화(국보 제 111호)와 주세붕의 초상화(보물 제717호)의 진품은 소수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영정각 앞에는 해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재던 해시계인 일영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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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세붕·이황의 글씨 만나는 죽계천

서원을 둘러보고 난 뒤 죽계천으로 나가면 붉은 글씨로 ‘敬’, 흰 글씨로 ‘白雲洞’이라고 새겨놓은 경자바위를 만난다. ‘敬’(경) 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쓴 글씨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죽계천은 1456년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이끈 단종 복위운동 실패로 무참히 살육된 순흥부 주민들의 시신이 수장되었던 곳으로 주세붕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敬’ 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냈다는 순흥 땅의 아픈 역사와 전설이 얽혀 있다. ‘白雲洞’(백운동)은 퇴계 이황 선생이 썼다고 한다. 경자바위 아래의 취한대(翠寒臺)는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근래에 복원한 정자로, 퇴계 선생이 짓고 나서 ‘죽계수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고 해서 ‘취한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죽계천 건너 뒤쪽으로 이어져 있는 소수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기면 지역 기증자들의 유물과 영주 지역의 선사시대, 삼국시대 그리고 불교문화, 옛 선현들의 개인문집, 나라의 교지 등을 볼 수 있다. 퇴계 선생이 별세하기 2년 전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 목판 원판이 전시돼 있고, 서원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통해 유교사상과 소수서원 역사 등을 배울 수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조선 초기의 천재 수학자며 천문학자인 영주 출신 무송헌 김담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 ‘김담, 역법을 완성하다’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소수서원 탐방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오래전 유생들이 공부하고 토론했던 공간을 둘러보면서 공부에 앞서 예를 우선시했던 선례후학(先禮後學)의 정신을 되새김질하는 여정이다. 인성 문제가 사회 문제로 불거지는 요즘, 소수서원은 올여름 피서지로 추천할 만한 곳이다.

chang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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