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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60년대 산부인과 모습은 어땠을까

이길여 산부인과 개원 60년…기념관 개관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전쟁이 끝난뒤 먹고 살기에 바빴던 1950∼1960년대까지만 해도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는 일은 드물었다.

의사의 역할은 산파가 대신했고, 대다수 산모는 집에서 이불 보나 심지어 지푸라기를 깔아둔 채 아기를 낳았다.

분만 시설을 제대로 갖춘 병원이 적었을뿐더러 따로 '보증금'까지 내야 했기 때문이다.

1977년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형편이 어려워 진료비를 내지 못하고 도망가는 환자들이 많자 병원들은 보증금 명목의 돈을 따로 받았다.

'산부인과' 간판이 걸려있는데도 다른 병을 앓는 환자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때 인천에서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이길여 현 가천길재단 회장이 친구와 함께 본인의 이름을 딴 산부인과를 1958년 차렸다.

지금의 차병원과 을지병원으로 이어진 차경섭 산부인과, 박영하 산부인과와 더불어 '전국 산부인과 3인방'으로 이름을 날렸다.

1950∼1960년대 산부인과 모습은 어땠을까 - 2

개원한 산부인과가 적은 데다가 여의사가 진료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병원은 임신부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특히 1960년대 정부가 적극적인 산아 제한 정책을 펴면서 산부인과를 찾는 중절 수술 환자들도 크게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우리나라 가구당 출산율은 6명이다.

환자가 많아지자 산부인과는 1969년 9층짜리 건물 36병상으로 규모를 늘리면서 최신식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우리나라에 단 4대만 도입됐던 태아 심박 초음파 기기 한 대와 자궁경부경도 병원에 들여왔다.

당시 초음파 기기는 4천만원(현재 7억원 상당)에 달하던 고가의 의료 장비였다.

산부인과 진료실 한편을 차지한 초음파 기기는 당시 명물 대접을 받았다.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들은 가족들은 "정말 우리 아가가 내는 소리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950∼1960년대 산부인과 모습은 어땠을까 - 3

산부인과 최초로 무보증금 제도를 들여오는 등 획기적인 시도도 잇따랐다.

간호사들은 접수대 앞에서 쩔쩔매거나 행색이 초라한 환자가 보이면 따로 표시를 해뒀다가 진료비를 받지 않기도 했다.

가천길재단은 13일 인천시 중구 동인천 길병원 옆 용동 큰우물공원에서 1950년대 산부인과 풍경을 기록한 '이길여 산부인과 기념관'을 열었다.

기념관은 1958년 인천시 중구 용동에 개원한 이길여 산부인과를 모태로 삼았다.

1층에는 당시 환자들이 진료비 대신 쌀가마니, 배추, 고구마, 생선 등을 가져온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이길여 산부인과는 1978년 바로 앞 부지에 종합병원 인천길병원이 들어선 뒤 현재까지 가천대학교 부속 동인천길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1∼3층 규모의 기념관에는 1960년대 당시 접수대, 대기실, 진료실, 수술실도 살펴볼 수 있다.

'보증금 없는 병원' 간판과 인천 최초의 초음파 기기 등 의료 장비와 왕진 가방 등 소품도 전시한다.

chams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6/13 11:26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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