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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혈액형은 우열이 없다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혈액형은 우열이 없다 - 2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의학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구한 위대한 발견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ABO식 혈액형의 발견이다. 이전에는 부상이나 수술·출산 중에 과다 출혈로 숨지는 일이 많았으나 수혈이 가능해지면서 위험성이 크게 줄었다.

피가 온몸을 순환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1613년이다. 그때부터 모자라는 피를 보충하거나 노쇠한 몸의 피를 건강한 피로 바꿔보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졌다. 처음에는 동물의 피를 주입했다가 나중에는 사람의 피를 넣었다. 그러나 모든 수혈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듯 보이는 사례도 있었으나 다음 시도에서는 실패가 반복됐기 때문에 안심하고 수혈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의문이 풀렸지만, 혈액형이 다른 피가 섞이면 적혈구가 엉기는 응집 현상이 일어나 모세혈관을 막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아낸 이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병리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1868∼1943)이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법령이 유대인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해 대학 때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대 병리해부학연구소에서 자신과 연구원들의 피를 뽑아 여러 가지 조합으로 실험해본 결과 피를 엉기게 하는 응집소가 두 가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각기 다른 응집소를 보유한 혈액형을 각각 A형과 B형으로 구분하고, 두 응집소와 섞여도 엉기지 않는 혈액형은 C형이라고 명명했다. 란트슈타이너는 이 내용을 담은 논문 '정상인 혈액의 응집 현상'을 1901년 11월 14일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그의 제자들이 두 응집소와 모두 반응하는 AB형을 찾아냈다.

1923년 미국 록펠러의학연구소로 옮긴 란트슈타이너는 그때까지 1, 2, 3, 4 혹은 A, B, C, AB로 나라마다 다르게 불리던 혈액형을 A, B, O, AB로 통일하자고 제창했다. C형은 응집원이 모두 없다는 의미로 숫자 '0형'으로 불렀다가 나중에 알파벳 'O형'으로 굳어졌다. 란트슈타이너는 ABO식 혈액형 말고도 1926년 MN식 혈액형과 P 혈액형을 더 발견했고 1940년 Rh 혈액형도 발견했다. 이밖에도 여러 학자의 추가 발견으로 혈액형은 모두 150여 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이 가운데 국제수혈학회가 주요 혈액형 분류법으로 고지하는 것은 30여 가지이며, 수혈 때 반드시 구분해야 하는 혈액형은 ABO와 Rh뿐이다. 란트슈타이너는 이 공로로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혈액형의 존재가 알려지자 지역별·인종별 혈액형 분포를 집계해 그 차이를 알아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폴란드 출신의 루트비히 히르슈펠트는 8천500여 명의 혈액형을 분류해 인종계수를 산출한 뒤 "진화한 민족일수록 B형보다 A형이 많다"는 연구 결과를 1919년 발표했다. 인종계수는 A형 인구를 B형 인구로 나눈 값으로, 서유럽인들은 모두 2.0을 넘었고 흑인이나 아시아인들은 그 이하였다. 유대인이나 러시아인도 1.3에 그쳤으며 흑인은 0.8이었다. 인도인이나 베트남인은 0.5에 불과했다.

이를 본격적인 민족우월주의로 연결해 식민지 지배나 전체주의에 활용하려는 시도도 등장했다. 1922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교실의 기리하라 신이치(桐原眞一) 교수와 제자 백인제는 조선 거주 일본인의 인종계수는 1.78인 데 비해 조선인은 평균 1.07로 나왔다고 발표했다. 기리하라 교수는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서구에 가깝다는 사실을 내세워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논리를 두둔하는 동시에 경기(1.00)나 평북(0.83)보다 전남(1.41)은 일본과 유사성을 보인다며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당위성을 시사했다. 독일의 인류학자 오토 레헤도 히르슈펠트의 연구 결과를 인종차별의 근거로 사용하려 했다. 심지어 독일 나치 정권은 우생학을 내세워 유대인의 말살을 꾀하는 단종법(斷種法)을 제정하기도 했다. 유대인이던 란트슈타이너로서는 통탄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과학적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혈액형뿐 아니라 피부 빛깔이나 모발의 형태 등 그 어떤 신체적 차이도 종족 간의 우열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현대과학의 통설이다. 미국의 석학 재러드 다이아몬드도 명저 '총, 균, 쇠'에서 "미국의 수많은 심리학자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들이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보다 선천적으로 지능이 낮음을 입증하려고 수십 년 동안이나 노력했지만 허사였다"고 지적했다.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을 밝혀내려는 시도 역시 마찬가지다. 혈액형 성격설이 유독 일본과 한국에서만 유행한다는 사실은 일제의 식민지배 논리를 떠올릴 때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4일은 '세계헌혈자의 날'이다. 2004년 세계보건기구, 국제적십자사연맹, 국제헌혈자조직연맹, 국제수혈학회가 란트슈타이너의 탄생일에 맞춰 헌혈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헌혈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제정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한적십자사 주관으로 해마다 기념식과 축하 공연을 열고 있다. 이날을 맞아 허황한 혈액형 성격설에 호기심을 품기보다는 혹시라도 우리 안에 인종차별주의나 에스노센트리즘(자민족 우월주의) 성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이웃을 위해 헌혈에 동참해보는 것은 어떨까.

heeyo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6/13 08:34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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