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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허리띠 7년째 졸라맨 그리스인들 "더 나빠지지 않기만 바랄 뿐"

수입 급감·세금 폭등 이중고…청년 실업률 치솟아
"서양문명 발상지라는 자존심과 끈끈한 가족 관계가 버팀목"

(아테네=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상황이 더 좋아지리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죠."

재정 위기로 2010년 이래 유로존에서 3차례 구제 금융을 받으며 연명하고 있는 그리스는 최근 유로존의 3차 구제금융 분할금 지급의 선결 조건으로 각종 세금을 줄줄이 올리고, 연금삭감 등 추가 긴축 조치를 단행했다.

경제 위기 이후 경제 규모가 4분의 3분으로 쪼그라든 가운데 7년째 긴축을 감내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은 이번 조치로 허리띠를 좀 더 졸라매야 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 주 수도 아테네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끝없이 계속되는 긴축에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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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1호인 파르테논 신전이 우뚝 서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인근에서 작은 옷가게를 운영하는 파나기오티스(65) 씨는 "비행기 정비공으로 일하다 은퇴한 뒤 2009년에 월 1천680 유로씩 나오던 연금이 계속 줄어 지금은 1천30 유로 밖에 받지 못한다"며 "조만간 더 깎이지 않을까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년부터는 경제 사정이 좀 좋아질 거라는 이야기들도 나오는 거 같지만 좋아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며 "상황이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연금이 깎인 후 뭐라도 해야겠기에 크루즈선 면세품 가게에서 일하다 옷가게를 냈다"는 그는 "세금도 너무 많이 올라 장사하기도 힘들다. 이번 정부는 무늬는 좌파지만 우파의 주머니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의 발언은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이끄는 그리스 집권당이 세금 인상 등 긴축에 반대하는 정책을 내세워 집권했지만 정권을 잡은 뒤 채권단 등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줄줄이 세금을 올리고 있는 것을 비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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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기념품 가게가 밀집한 플라카 지구에서 올리브를 이용한 특산품 판매점을 운영하는 30대 후반 여성 마기아는 "관광객들이 다행히 많이 줄지는 않았지만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며 "나는 다행히 온라인 쪽으로 일찌감치 사업을 다각화해 크게 어려움은 없지만 사촌 동생들이나 조카들을 보면 대학을 졸업해도 놀고 있거나, 직업을 구하더라도 쥐꼬리 만한 월급을 받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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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리스는 아직 가족 간의 유대가 끈끈해 그마나 청년 실업자들을 부모나 친척이 대신 지원하며 사회가 근근이 돌아가고 있다"며 "하지만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중산층이 다 무너지고, 국가는 귀중한 자산을 외국에 다 팔아버려 그리스가 빈 껍데기만 남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불안감을 내비쳤다.

그리스는 국가 채무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주요 항만이나 공항, 지중해 섬들을 민영화해 중국, 독일 자본에 매각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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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중심가 신타그마 광장 인근의 중급 호텔 카롤리나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청년 기오르기는 3교대로 한 달 동안 일해 손에 쥐는 돈이 세금을 떼면 499 유로에 불과하지만 자신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그리스에서는 4명 중 1명이 실업 상태에 놓여 있으며, 청년 실업률은 50%에 달한다. 비교적 괜찮은 직업으로 꼽히는 은행원의 경우에도 초봉은 월 약 700유로, 학교 교사는 초봉이 월 약 600유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인데 나는 운좋게 일자리를 구했다"며 "비록 전공인 와인 제조법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지만 그리스에서는 요즘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는 건 사치다.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말했다.

30년 넘게 그리스에서 살고 있는 김기석 그리스 한인회 회장은 "경제 위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리스인들이 시장에서 장을 본 뒤에는 꼭 마지막에 꽃을 사들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며 "긴축이 시작된 뒤로는 꽃을 사는 사람이 뚝 끊긴 것을 보고 이 사람들 형편이 정말 어려워졌다는 걸 실감한다"고 전했다.

김 회장은 "가게들도 예전에는 점심 식사 후엔 몇 시간씩 문을 닫고, 저녁에도 일찍 마감하고 놀러나가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요즘엔 카페도 24시간씩 문을 여는 데가 많아졌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위기의 바닥이 어디인지, 고통스러운 긴축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리스인 특유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어스름이 깔리면 아크로폴리스의 아랫 동네에 빼곡히 들어선 식당가에는 밤 2∼3시까지 현지인과 관광객이 어우러져 먹고, 마시고, 노래하는 소리로 도시 전체가 활기를 띤다.

연구원으로 일하는 30대 초반의 여성 마리아는 "삶의 본질은 가족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아니겠냐"며 "그리스인들은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민주주의 발상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삶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려 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K-팝과 한국 드라마 등 한국 문화에 심취해 있다는 카롤리나 호텔 직원 기오르기도 "한국에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이라며 "왕복 비행기표가 600 유로가 넘어서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한국에 꼭 가서 좋아하는 가수를 직접 보고 말 것"이라며 밝게 웃었다.

한편, 옷가게 주인인 파나기오티스 씨는 "그리스인들의 사고 방식은 서유럽이나 미국의 기준과는 많이 다르다. 뜨거운 햇살과 넘실대는 바다가 있는 밖으로 나가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게 우리의 문화"라며 "서방이 너무 자신의 잣대에 맞춰 그리스를 압박하고 쥐어짜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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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hyun14@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6/13 06: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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