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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숙의 시각> 촌철살인의 언어를 꿈꾸다

송고시간2016-05-25 07:31

<현경숙의 시각> 촌철살인의 언어를 꿈꾸다 - 2

(서울=연합뉴스) 현경숙 논설위원 = 요즘 세계 어디를 가나 대도시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화의 결과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는 물건과 옷차림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동차, 휴대전화, TV, 패션들이 낯설지 않고 빌딩 모양, 음식도 익숙하고 은행 간판 역시 많이 보던 것들이다. 세계 유명 의류 브랜드 'H&M'과 '자라'는 세계에 매장이 각각 4천여 개, 7천여 개에 이른다고 하니 지구촌에 친숙한 느낌의 옷을 입은 이들이 물결을 이룬다.

아무리 세계화가 거세진다 해도 유사해질 수 없는 게 사람과 언어일 것이다. 수입 가능한 대체재가 없기 때문일 텐데 매우 빠른 말의 변화는 2~3년 해외에서 일하다 귀국한 기업인이나 외교관들에게 한국 사회의 독특함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N포세대(꿈, 희망, 모든 삶의 가치를 포기한 20~30대 세대), 눈팅(눈으로 하는 채팅), 김여사(운전이 미숙한 중년 여성), 혼술(혼자 먹는 술), 불금(불타는 금요일), 볼매(볼수록 매력적인), 반품남(애인과 결별하거나 이혼한 남자), 한남충(한국 남자 벌레) 등의 말은 외국에서 유사품을 찾아볼 수 없다. 얼른 뜻이 떠오르지 않기도 하는데 대개 온라인 메신저, 전화 문자메시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활발해지면서 생긴 신조어들이다. 이 새 낱말들은 은어, 속어, 비어일 때가 많지만 훈훈한 정을 담고 있기도 하고 예리한 풍자와 해학을 품고 있어 통쾌함을 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촌철살인의 언어들이다.

한국 문단의 거목이면서 따뜻한 언어로, 고단한 삶에 지친 독자를 위로했던 고 박완서 선생도 젊었을 때 "촌철살인의 언어를 꿈꿨다"고 말한 적 있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이들은 '빵'하고 웃음보를 터뜨리거나,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표현을 갈망한다. 그런데 통통 튀는 기지 밑으로 멸시, 비하, 폭력을 한 자락 깔고 있는 신조어들의 범람은 마음 한 구석에 씁쓸함을 남긴다. 또 미사여구가 넘치는 글이 큰 감동을 주지 못하듯, 계속되는 '살인'의 자극은 무감각, 무덤덤하게 만들고 재치 '소화불량'을 초래한다고나 할까.

지난해는 경기 침체로 인해 생활고, 취업난, 계층갈등을 보여주는 신조어가 많았다. '흙 수저' '갑질' '청년 절벽'은 언론과 인구에 가장 자주 회자한 단어가 아닐까 한다. 우월한 지위의 악용을 뜻하는 '갑질'의 어감은 왠지 더 찜찜하다. 말뜻이 부정적이기도 하지만 갑질 논란과 파문을 보자면 폭발 직전에 들끓는 계층갈등, 분노, 질시가 느껴진다. 욕설, 시장바닥의 소란이 연상된다.

이런 요란한 유행어들도 온라인상의 '언어 테러', 일부지만 정치인의 막말과 비교하면 점잖고 애교에 가깝다. 막말 '종결자' 도널드 트럼프는 여성을 비하하는 망언을 일삼고 비판하는 기자들을 "쓰레기"라고 불렀다. 그는 막말 공세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뒤 160여 년 전통의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는데 황당하게도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제기해 공분을 사고 있다. 한국이 1조 원 이상의 주한미군 주둔비를 부담하는 현실을 부정하는 막무가내식 주장으로 국제 외교를 혼란이 빠뜨리고 있다. 목소리 크면 이긴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당선되면 그의 공세를 감당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다.

필리핀의 트럼프로 불리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당선인의 발언은 더 가관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면 모든 범죄자를 처형하겠다" "범죄자 10만 명을 죽여 물고기 밥이 되도록 마닐라만에 버리겠다"고도 말했다. 그는 작년 1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필리핀 방문 때 도로 통제로 교통 체증이 빚어지자 "개XX, 집으로 돌아가라"는 망발을 했다.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자이르 보우소나르(61) 브라질 하원의원은 "나는 게이 아들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며 "그런 아들은 사고로 죽는 게 낫다"는 패륜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막말 정치인의 득세에 대해 팍팍한 살림살이, 불안한 치안에 대한 불만과 저소득층의 상실감 탓이라고 풀이했다. 점잖은 기성 정치인들이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데 분노한 유권자들이 새롭고 자극적인 새 정치인들을 지지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것이 고되고 미래가 불투명해지니 애정 어린 넉넉함으로 시대를 보듬었던 박완서 선생 같은 어른이 그리워진다. 흔히 한국은 원로나 어른이 존경받기 어려운 사회라고 한다. 일차적으로 지도층이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데 원인이 있겠지만 험한 대거리 문화도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어른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가 아닐까 한다. 저잣거리처럼 소란스럽고, 냄비같이 쉽게 뜨거워지는 말의 장이 원로나 어른들에게 나서길 꺼리게 한다는 것이다.

핫하고 쿨해야 통하는 요즘, 달착지근하거나 시지 않고 감칠맛 나는 냉면이나 구수하면서도 담백한 설렁탕 같은 언어가 먹히길 바란다면 시대착오일까. 순한 언어가 저변을 형성하고, 우리 사회의 정서가 순화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불안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묵묵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편안한 사회가 돼야 가능할 것 같다. 이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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