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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故문옥주 증언, 기록 일치"

아사히신문, 미얀마 답사취재와 함께 소개
이례적 저축, 우파 학자 '전쟁터 공창제' 주장 빌미 되기도
"일본군 철수 직전에 군 화폐 가치 폭락했을 때 받은 돈" 반론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평일에는 하루에 십수∼수십 명을 상대했다. 오전 9시부터는 병사, 오후 4시부터는 하사관, (오후) 9시 이후에는 자고 가는 장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문옥주(文玉珠1924∼1996) 씨가 남긴 증언은 미군이 미얀마에서 포로로 잡은 조선인 위안부 심문 보고서나 일본군 규정 등과 거의 일치한다.

아사히(朝日)신문은 문씨가 위안부로 머문 미얀마 현지 답사 취재를 계기로 그의 증언을 각종 기록에 등장하는 것과 비교해 17일 소개하고서 이같이 평가했다.

학교에 다니지 않아 읽고 쓰기가 서툰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과 달리 문 씨는 야간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운 덕에 자신이 머물렀던 미얀마의 지명이나 부대명을 구체적으로 답변했다.

문 씨의 증언은 군의 자료나 병사들의 진술과 비교·추적 조사할 수 있는 드문 사례로 평가받는다.

"위안부 피해자 故문옥주 증언, 기록 일치" - 2

만주 북부에서 한 차례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극적으로 고향에 돌아온 문 씨는 1942년 '군의 식당에서 일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권유로 부산에서 배를 타 두 번이나 위안부 생활을 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는 미얀마에서 조선인 병사로부터 '속아서 왔구나. 불쌍하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위안소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진술했다.

문 씨는 자신이 미얀마에서 "다테 8400부대의 군속(군무원)이었다"고 말했는데 '다테(楯, 방패라는 뜻)'라는 별칭이 붙은 육군 제55사단의 사령부가 바로 4800부대였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문 씨는 자신이 미얀마에서 머물렀던 프롬 지역에 있던 위안소의 이름이 '오토메'(乙女)라고 지목했다.

프리랜서 작가 모리카와 마치코(森川万智子) 씨는 일본군 통역으로 근무했던 인물을 1997년에 만나'위안소에 오토메라는 조선인 그룹이 와 있었다'는 증언과 함께 '오토메'로 사용된 시내의 주택을 안내받기도 했다.

모리카와 씨는 1997∼1998년 미얀마에서 위안소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건물 22개를 주민의 증언이나 군의 자료로 확인했으며 "오토메라는 위안소의 이름이 일치하는 등 문 씨의 기억을 확실히 실감하게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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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노래도 부를 줄 알았던 문 씨는 장교들의 술자리에서 춤이나 노래를 선보이고 받은 팁을 '군사우편저금' 계좌에 저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안부 피해자가 군사우편저금에 저축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인데 이것이 피해자의 당시 처지에 관한 논쟁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문씨가 저축한 돈은 2만6천145엔이고 전쟁 후 쌓인 이자까지 계산하면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 기준 잔액이 5만108엔이다.

우파 성향의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1943년 칙령인 '대동아전쟁육군급여령'에 따르면 중장의 연봉이 5천800엔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문씨가 당시 미얀마의 일본군 최고 지휘관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다고 '위안부와 전장의 성'이라는 책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위안부는 공창제가 전쟁터로 이동한 것뿐'이라는 주장을 편 학자인데 문 씨의 사례를 근거로 활용한 것이다.

이에 관해 위안부 연구의 선구자인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中央)대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의 대부분이 돈을 받은 적이 없으며 문씨가 팁을 모은 것이 극히 이례적인 사례라고 반론한다.

요시미 교수는 문 씨 저축 원금의 약 80%인 2만560엔이 1945년 4∼5월에 예치된 점을 근거로 '예금의 대부분은 일본이 미얀마에서 철수를 결정해 군표(軍票, 일본이 전쟁 중 군사 자금 조달을 위해 발생한 지폐)의 가치가 거의 없어졌을 때 받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문 씨는 1991년 일본에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고 저축한 돈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는 '저금에는 슬픈 역사가 들어 있다'고 호소했고 1992년 5월에 당시 우정성 구마모토(熊本)저금사무센터에서 일본식 이름인 '후미하라 교쿠슈'(文原玉珠) 명의의 계좌가 확인됐다. 하지만 문 씨는 1996년에 세상을 떠나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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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wonle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5/17 11:58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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