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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香萬里> '세르비아 전범' 내세운 오브라이언의 10년만의 신작

송고시간2016-04-09 09:30

소설 '작은 빨간 의자들' 출간…美언론 "묵직한 도덕적 질문으로 독자 매혹"

(워싱턴=연합뉴스) 신지홍 특파원 = 춥고 어두운 어느 겨울 밤. 아일랜드의 클루노이라는 작은 마을에 한 이방인이 당도한다. 음울하면서도 미남이며, 세상사를 두루 경험했다는 그는 '전인적 치유사'이자 '섹스 테라피스트' 등 대체 의학자를 자처한 불가사의한 남자다.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드라간. 작은 마을의 단조로움을 깬 그의 방문은 호기심 어린 환영을 받는다. 그를 만난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백발에 흰 턱수염을 한 블라디미르는 "완전한 신사", "성직자와 같은 아우라를 지닌 선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름다운 흑발의 소유자인 피델마 맥브라이드라는 중년 여성이 그가 놓은 덫에 걸려든다.

2차례 유산한 뒤 결코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깊었던 그녀는 어느 날 블라디미르를 찾는다. 불임과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전적으로 기대게 되는 피델마. 결국 블라디미르의 아이를 갖는 문제적 상황에까지 이른다.

이윽고 충격의 반전이 펼쳐진다. 블라디미르가 수배된 세르비아 전범이자 '인종 청소'의 장본인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는 체포됐고, 블라디미르가 대량학살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와 '결합'한 피델마의 삶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무지'(순진함)가 낳은 처절한 결말이다.

아일랜드의 여성 작가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소설 '작은 빨간 의자들'(The Little Red Chairs)이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에서 나왔다.

작가가 10년 만에 선보인 신작이다. 억압과 폭력, 악(惡), 배반에 의해 짓눌렸거나 부서진 여성과 소녀들의 삶을 기록하는 글쓰기를 고집해온 거장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수작이라고 미국 언론이 일제히 평했다.

작품의 모티프는 옛 유고연방 보스니아 내전 당시의 대량학살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소설의 이방인인 블라디미르는 '인종청소' 혐의로 기소돼 전범재판을 받다 얼마 전 징역 40년을 선고받은 세르비아계 정치지도자이자 '인간 도살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분신이다. 실제 카라지치도 체포되기 전 10년 이상을 베오그라드에서 드라간 다비치라는 가명으로 개인병원을 운영하며 대체의학자로 행세했다.

소설의 제목에 사용된 '빨간 의자'는 비극이 시작된 사라예보 봉쇄 20년을 맞아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놓였던 1만1천541개의 빨간 의자에서 빌려왔다. 이 가운데 작은 의자 600여개가 당시 살해된 어린이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書香萬里> '세르비아 전범' 내세운 오브라이언의 10년만의 신작 - 2

자칫 이 소설은 이방인이 대량학살자임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반전을 통해 독자를 충격에 빠뜨리는 미스터리나 스릴러 등 평범한 장르물로 전락할 수 있었다. 뻔한 역사소설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장의 관심은 단순히 보스니아 내전이나 카라지치의 악, 그리고 학살의 희생자들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음으로써 독자를 매혹하고 작품을 우리시대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또 오브라이언의 시선이 매우 우연하고 부차적으로 악과 연루된 한 여린 영혼의 파괴와 치유의 과정에 닿았다는데 주목했다.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는 지난달 28일자 뉴욕타임스 서평에서 "이 소설은 묵상과 참회의 이야기"라며 "비록 무지(순진함)로 인한 것일지라도 악과 공모한 자신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라고 썼다. 또 "우리의 공동체에 문득 나타난 이방인을 신뢰해야 하는가, 불신해야 하는가를 그는 묻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츠는 "이 소설에서 많은 일은 무지로 인해 일어났다. 현실에서처럼"이라며 "(소설의 주인공들이) 남을 충분히 의심하지 않은 대가는 너무 큰데, 흔히 그 대가를 치르는 이들은 소녀와 젊은 여성들"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한 면 전체를 할애한 지난달 30일자 서평에서 "작가는 20세기 가장 악명높은 괴물 중 한명과의 짧은 교차로 인해 평범했던 삶이 망가진 여성, 피델마의 우연한 희생에 주목했다"고 평가했다.

'작은 빨간 의자들'은 오브라이언의 23번째 작품이다. 오브라이언은 첫 작품이자 출세작인 '시골 소녀'(The Country Girl)에서 교회와 가정의 가부장적 압력에 짓눌린 소녀들의 삶을 기록한 이래 60여 년간 이 주제에 몰두해왔다. 성애적 표현이 가득했던 이 소설은 당시 가톨릭 보수주의가 팽배한 그녀의 고국 아일랜드에서 불태워지고 판금됐다.

낙담한 오브라이언은 런던으로 거처를 옮겨 85세가 된 지금까지 머물러왔다. '작은 빨간 의자들'도 런던에서 쓰였다. 악과 연루돼 그 삶이 철저히 부서진 피델마가 결국 런던으로 이주해 속죄와 구원의 낮은 발걸음을 내디딘다는 이 소설의 설정은 과연 우연일까.

299쪽. 리틀, 브라운 앤드 컴퍼니 출간.

sh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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