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참정권을 위해 돌을 집어든 가정의 천사"
송고시간2016-03-08 08:00
영국 여성운동의 대모 에멀린 팽크허스트 자서전 국내 출간
(서울=연합뉴스) 권혜진 기자 = 20세기 초 영국에서 '서프러제트'(suffragette)로 불리는 전투적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시민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년)의 자서전이 국내 처음으로 번역됐다.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춰 현실문화에서 펴낸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는 영국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던 1900년대 초반 팽크허스트가 여성참정권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참정권 쟁취를 위한 운동에 뛰어들게 된 사연부터 평화롭고 합법적인 운동 대신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여성 운동을 선택한 배경,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정부와의 전쟁에 휴전을 선언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겼다.
책은 팽크허스트의 어린 시절 회고에서 출발한다. 그녀는 어릴 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던 중 아버지가 머리맡에서 "얘가 남자애로 태어나지 않아서 안됐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팽크허스트는 그때의 기억이 '남자들은 자신들이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여자들도 그런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됐다'고 말한다.
실제로 1910년대까지도 영국 여성은 정당에 가입할 수는 있어도 투표는 할 수 없는 기이한 신분이었다. 여성 운동가들은 남성 정치인이 여성참정권법안을 발의해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이들을 설득하는데 온 힘을 쏟지만 법안 발의에 나서는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다.
팽크허스트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더해 빈민구제위원회에서 일하며 만난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에 여성참정권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구호소에 있는 대다수는 남편 사후 무일푼이 된 여성이나 하녀로 일하다 강제로 임신하게 된 소녀였다.
특히 임신한 소녀들은 해산 직전까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해산 후 2주가 지나면 아기를 데리고 떠나든지 아기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면 법률이 개정돼야 하지만 투표권 없는 여성은 빈곤과 폭력을 방지할 작은 법 조항 하나 바꾸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마침내 팽크허스트는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합을 창설해 여성을 결집하고 집회와 선전활동, 낙선운동을 통해 싸워나간다. 특히 1908년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수상의 자유 내각이 들어서자 전략을 바꿔 전투적 전술을 채택했다.
"인간의 정치적 진보는 언제나 폭력과 재산 파괴 행위와 더불어서만 가능했기 때문"(276쪽)이라는 것이 팽크허스트가 전략을 바꾼 이유다.
이로써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헌신적인 여성성'에 빗대어 표현한 '가정의 천사'들은 돌을 집어들고 '얌전하고 조신하고 순종적인' 전통적 여성상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책은 1차 세계대전으로 팽크허스트가 정부와의 전쟁에 휴전을 선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팽크허스트는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성 참정권 운동을 지속했으며 영국 정부는 마침내 전쟁이 끝난 후인 1918년 21세 이상 모든 남성과 일정 자격을 갖춘 30세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 그리고 팽크허스트가 숨진 지 몇 주 후 21세 이상 모든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된다.
영국에서 출간된 지 100년 만에 국내에 소개되는 이 책은 팽크허스트가 1913년 미국인 저널리스트인 레타 차일드 도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구술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지난해 10월 영화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주연을 맡아 영미권에서 개봉한 영화 '서프러제트'가 이 책을 근간으로 만들어졌다.
김진아 충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와 권승혁 서울여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함께 번역했다.
480쪽. 1만8천원.
luci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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