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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현의 풍진세상> 축에 몰린 역사인가

<김종현의 풍진세상> 축에 몰린 역사인가 - 2

(서울=연합뉴스) 김종현 논설위원 = 바둑에서 축은 마물(魔物)이다. 여기에 제대로 걸리면 그 바둑은 끝장이다. 돌을 던지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손바람을 내다 깜박 실수로 축에 몰려 한 번 패하고 나면 판을 엎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바둑에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고수는 축을 이용하고 하수는 축에 걸려 망한다. 그게 바둑 세계의 진실이다.

조선 말기의 한반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고종이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한 1873년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강탈당해 식민지로 떨어진 1910년까지의 37년 한반도 역사는 바둑으로 얘기하면 딱 축에 걸린 모습이다. 사자 우리에 던져진 고깃덩이, 하이에나에 몰린 톰슨가젤이 그러했을까.

우리 역사에서 이 시기를 들여다보는 건 고통이다. 하는 일마다 안되는 쪽, 그것도 늘 상황은 최악으로 흘렀다. 역사의 판을 뒤집을 수 있다면, 그래서 바둑에서 수를 물리듯 다시 판을 짤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가슴을 친다. 그 역사가 너무 가련하다. 시인 김수영은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소리쳤지만 그런 관대함이 누구나 가능한 건 아니다.

정말 조선말(대한제국까지 포함)은 도저히 헤어날 길 없는 운명의 시기였을까. 조선의 지도층이 일찍 상황의 엄중함을 자각하고 국가의 힘을 결집할 수 있었다면 노예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숙명론에 빠지면 역사를 막다른 길로 끌고 간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의 통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된다.

일본과 청, 러시아 등의 열강은 합법을 가장한 불법과 무력으로 '순진무구한' 조선을 농락했다. 헤어날 수 없는 올가미로 정치ㆍ외교ㆍ경제ㆍ군사권을 묶었다. 그들은 조선을 장물처럼 제멋대로 흥정하고 거래했다. 이들에 저항할 힘이 없었다는 것이 조선의 비극이었다. 그런 늑대들을 조선의 지도자들이 정략적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은 더 큰 문제였는지 모른다.

햄릿형 군주인 고종과 민비 일족, 대원군의 권력의지는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리 유지에 급급했을 뿐 백성은 안중에 없었다. 열강의 이권 다툼과 정치 공작, 지배 계급의 권력투쟁으로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국정은 리더십이 흔들리면서 난파선처럼 표류했다. 최근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이 고종과 민비를 미화했지만 역사의 법정에서 이들은 죄인일 뿐이다. 나라와 백성을 지켜내지 못한 자격없는 통치자들이었다.

기우는 나라는 탐관오리의 세상이다. 왕조를, 때로는 백성을 위하는 척하면서 저마다 뱃속 차리기에 급급했다. 곶감 빼먹듯 나라 재산을 외세에 넘겼다. 왕과 비, 신하가 따로 없었다. 수구파는 기득권 유지에 골몰했고 개화파는 의기만 높아 성급하게 날뛰다가 뜻이 꺾이고 자멸했다. 벼슬아치는 완장 찬 도적일 뿐이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씨 척족의 세도와 후안무치한 매관매직을 낱낱이 고발한다. 이들에 빌붙어 벼슬을 차지한 자들은 돈을 들인 만큼 백성의 피를 뽑아야 했다.

당대의 지식인인 유림(儒林)의 허물도 가볍지 않다. 열강이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을 실현한 뒤 동쪽으로 몰려와 영토 쟁탈전에 나서고, 청이 아편전쟁으로 무너지는 천지개벽 속에서 나라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들의 왕조에 대한 충절, 기개와 용기는 가상하지만 오래전 망한 명(明)에 대한 사모와 '척양척왜(斥洋斥倭)' 외에 어떤 지향이 있었던가. 1868년 일본 메이지유신의 주역인 젊은 조슈(長州) 사무라이들은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선진 문물을 흡수했다. 조선의 유생들은 당시 상투를 부여잡고 무엇을 했는가. 서양과 그 문물에 대한 고루하기 짝이 없는 맹목적 혐오와 배타성이 개방과 개혁의 싹을 지우고 조선의 숨통을 막아버린 것은 아닌가.

사람들은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이 구한말 같다고 하지만 지금은 구한말이 아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국력을 이름뿐이었던 대한제국과 비교하는 건 자학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3만 달러에 육박하는 국민소득, 문맹률 제로에 가까운 국민의 교육수준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주변 열강과 비교하면 땅이 좁고 인구가 적다는 것뿐, 누구도 우리를 가볍게 볼 수는 없는 위치다. 북한이라는 변수가 부담이지만 우리 하기에 따라서는 선택의 폭도 넓다. 축에 걸린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해외에선 대한민국을 인정하는데 안에서는 허구한 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저주의 말 폭탄이 난무한다.

97년 전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선열들이 세계만방에 독립을 외쳤던 3월이다. 주권 국가가 맞나 할 정도로 과도하게 주변국의 눈치를 살피는 나약함을 떨쳐내고 정부와 정치권, 국민이 체통과 자존을 찾아야 할 때이다. 미국이건 중국이건, 일본이건 우리 국익으로 판단해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외교에서 유연성을 잃어선 안 되겠지만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나 부당한 압력에는 결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래야 일개 외국 대사한테 오만방자한 협박의 수모를 겪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지 않고는 안보도, 경제도 바로 세울 수 없다.

kimjh@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2/29 07:3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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