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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안익태의 마음속 고향은 '평양, 코리아'

연주 후 '4천년 역사' 강조…커티스음악원 수학하지 않은 증거도 발견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기자 = "4천여 년 이상 장구한 역사 아래 동서로 헤매는 불쌍한 2천만 동포 앞에서 연주하자니 눈물이 앞을 가려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1936년 3월 26일 신한민보의 안익태 기고문)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 도착한 안익태가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붙여 동포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안타까워 5년 반에 걸쳐 애국가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다만 기고문에서 안익태가 '4천여 년 이상의 장구한 역사'라고 표현한 부분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유럽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도구로써 음악활동을 할 때 매번 한국 역사를 2천년이라 했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애국가' 안익태의 마음속 고향은 '평양, 코리아' - 2

재미 민간사학자 유광언씨는 안익태의 1930년대 미국 유학 시 족적을 제대로 확인하고자 신한민보와 한인학생회보 등 문서를 찾고 안익태가 다닌 것으로 알려진 음악교육기관을 돌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기록들을 11일 연합뉴스에 공개했다.

유씨는 "최근 밝혀지는 친일행적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는 안익태가 최소 미국 체재 9년간은 적극적으로 반일운동을 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적어도 애국가는 순수한 애국 애족의 열정으로 만든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안익태는 일본 여권을 얻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1930년대 한국인이 총독부에서 받을 수 있는 여권은 98매에 불과했다.

안익태가 98매 중 하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큰형 안익삼이 총독부에서 여권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애국가를 작곡하는 것은 금기라는 것을 안익태도 충분히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익태는 5년에 걸쳐 애국가를 완성해냈고, 실제 애국가 악보는 미국서 출판되자마자 일제의 금지 단행본 목록에 추가됐다.

1930년부터 1933년 사이 안익태의 신시내티음악원에서의 생활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유씨가 해당 학교로부터 얻어낸 학적부와 2년 4학기 간 성적표는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려줬다.

안익태는 1930년 9월18일 작성된 학적부에 주소를 'Pyeng Yang, Korea(평양, 한국)'로 적었다.

유럽생활 때는 주소를 '평양 조선', '일본 동경'이라고 적었다. 심지어 독일 안익태 매니지먼트사에서 만든 소개서에는 '일본의 속국인 조선의 평양에서 태어났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쓴 것과는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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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하면 '커티스음악원'을 떠올리는 것도 잘못된 기록으로 공식 확인됐다.

유씨는 안익태가 템플음악대학원에서 수강하면서 굳이 커티스음악원에 또 다닐 이유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지난달 25일 해당 학교 문서보관소에 문의한 결과 '안익태는 이 학교 학생도 아니었고, 가르친 적도 없다(Ahn never a student here at Curtis, and did not teach here either)'는 공식답변을 받았다.

근거 없는 소문이 80년간 떠돈 이유는 한국학생회보 1935년 5·6월호의 기사 한 줄에 기인하는데, 이후 확인 없이 계속 인용해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애국가는 1936년 초 샌프란시스코 대한국 국민회 명의로 대한국 애국가(Korean Nation Hymn)로 신한민보에서 인쇄, 판매됐다.

그러나 1934년 안익태의 한국생활 모음곡을 출판한 엘칸 보겔판에선 '국가(National Anthem)'로 출간됐다.

유씨는 "'Hymn'과 'Anthem'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며 "국권이 회복되면 애국가가 국가가 되기를 희망한 안익태의 꿈이 배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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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8년 한국학생회보에 실린 안익태 인터뷰를 정리한 것으로 새로운 기록을 마무리했다.

"한국인들은 아일랜드의 자유를 얻기 위한 (대영) 투쟁에 감동했다. 한국도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 지배하에 있지만 많은 민족주의자가 국권을 회복하자는 여론을 조성하며 정치범으로 투옥됐다. 그러나 투쟁은 계속 돼 나의 조국도 머지않은 장래에 아일랜드처럼 독립국가가 되길 희망한다."

10년이 가까운 미국 생활을 뒤로하고 유럽으로 이주한 안익태를 기다린 것은 2차대전의 소용돌이였고, 그의 작곡 활동은 일본제국의 국익에 맞게 변질됐다.

lisa@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2/11 06:15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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