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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100년> ③ 격리·통제에서 치료·보호기관으로

일제 식민정책으로 개원…한국전쟁 뒤 한때 6천여명 수용아픈 과거 강제노역·감금·통제·폭행 일상화…지금은 사회복지공간

(고흥=연합뉴스) 여운창 기자 = 국립 소록도병원이 고흥에 자리 잡은지 100년이 됐다.

그동안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섬의 모양이 작은 사슴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의 소록도(小鹿島)는 그 자리 그 곳에서 한센인과 함께 1세기의 세월을 보냈다.

1910년대 일제가 한센인 관리 목적으로 설립한 자혜의원이 소록도병원의 시작이다.

지금은 550여명의 한센인이 거주하고 있지만 한때 수용환자가 6천명이 넘었다.

나환자, 문둥병, 천형으로 불리는 한센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오해로 멸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누가 혹시 알아볼까 봐 가족에게도 감염 사실을 숨기고 숨죽이며 숨어 살아야 했던 소록도 한센인들의 100년을 살펴본다.

◇ 일제 식민지정책의 하나로 시작

1910년대초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 부산·광주·대구에서 한센병 환자에 대한 격리 치료와 관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일제는 이같은 서양의 의료선교가 식민지 지배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 수용되지 못한 채 배회하는 환자를 포함한 요양소를 만들기로 했다.

1916년 2월 24일 전남 고흥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 전문 수용시설로 자혜의원이 문을 열었고 이듬해 5월 17일 정원 100명 환자 73명으로 공식 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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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무 총감부 조사에 따르면 전국 나환자는 3만6천여명이었다. 소록도병원에는 이중 극히 일부만 수용해 병원 설립 목적이 치료와 관리에 있다기 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개원 10년이 지난 1925년에야 수용인원이 250명으로 늘었고 1933년에 와서야 1천명이 넘어 이때에야 비로소 전문 수용시설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수용인원의 증가에도 1928년까지 치료·관리인력은 10여명에 불과했다. 1930년대에야 관리인력을 중심으로 증원됐지만 치료인력은 여전히 10여명에 그쳤다.

◇ 수용인원 급증…격리체제 강화

자혜의원이란 이름은 1934년 소록도갱생원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원생 규모가 3천명을 넘어섰고 1천명 단위의 수용정원 증원이 1년 단위로 이어져 그에 따른 확장 공사도 계속됐다.

1933년에 1천명을 넘어선 환자 수는 이듬해 2천명을 웃돌았고 1935년 3천700명, 1937년 4천700명, 1938년 5천명, 1939년 5천900명, 1940년 6천100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를 관리할 전체 직원은 1934년 100명에서 1939년 261명으로 2.5배 정도 늘어나는데 그쳐 1인당 환자 수는 거의 600명에 달했다.

전시체제에 접어들면서 환자에게 지급해야 할 각종 의약품 공급도 매년 감소했으며 제공되는 음식도 급격히 줄었다.

확장공사도 환자들의 강제노역으로 대부분 이뤄져 불충분한 의료와 영양결핍으로 환자 고통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환자 관리 통제도 강화됐다.

총독부는 갱생원 환자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동원하면서 폭행과 감금을 통한 처벌형의 강력한 방식을 취했다

특히 결혼은 단종수술을 전제로 했으며, 감금실에 유폐됐다가 출감할 때에도 강제로 단종수술을 행하기도 해 일종의 형벌로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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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갱생원 내에 형무소가 설치돼 나환자 수형자의 수감도 시작했으며 그 건물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부실한 치료, 엄격한 강제격리, 열악한 생활로 갱생원 시절 치료퇴원은 단 1명도 없어 이 시기는 치료보다는 격리와 강제 노동뿐이었다.

'죽어서라도 나가고 싶은 소록도'라는 말이 이때 등장했으며 살아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사고나 도주가 유일했다.

◇ 광복 뒤 혼란은 소록도에도

해방 정국의 온 나라를 뒤덮었던 혼란을 소록도도 비켜나지 못했다.

병원을 운영하던 일본인들이 물러나자 운영권을 둘러싸고 의사와 직원간 내부갈등이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무장 치안대가 들어와 마을대표 원생 84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은 발생 직후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듬해에야 외부에 드러났고 한국전쟁이 끝난 1956년 진상조사가 시작돼 그로부터 57년이 흐른 2002년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해방 이후 수용인원이 4천400명대로 갑자기 줄어든 것은 관리가 소홀하면서 탈출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군정이 단속을 강화해 1947년 수용인원이 6천254명을 기록했다. 이는 개원이래 가장 많은 수치다.

같은 해 환자 자치회가 구성돼 원생 대표를 직접 선출했고 처음으로 중학교가 세워졌으며 의료인 양성을 목적으로 의학강습소도 설립됐다.

1948년 원장이 바뀌면서 소록도병원은 직원지대와 환자지대가 엄격히 분리된다.

직원지대인 무독지대와 환자지대인 유독지대로 나눠 남북으로 길게 아카시아 나무를 심고 가시철망을 두르고 철문을 달아 경계선 감시소를 통해서만 이동이 가능하도록 했다.

면회소도 별도로 만들었는데 이때 그 유명한 수탄장(愁嘆場)이 등장했다.

직원지대의 보육소에 있는 미감아와 환자지대에 있는 부모가 만날 때 미감아들은 바람을 등지고 환자 부모는 바람을 맞고 도로 양 옆으로 갈라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면회를 했다.

부모가 자식을 만지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며 넋을 잃고 울 수밖에 없다고 해서 이곳을 수탄장이라고 불렀다.

전쟁의 불길은 소록도도 피할 수 없었고 인민군이 섬을 장악해 강제노역과 식량운반 등에 동원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이념을 둘러싼 원생간 불화는 없었다.

전쟁 당시 100명의 북한 나환자가 1951년 1.4 후퇴당시 UN군과 철수하면서 소록도로 들어오기도 했다.

전쟁기간 직접 폭격이나 방화, 화재 등이 없어 6천100명의 수용정원은 1950년대내내 유지됐다.

1953년 갱생원 건물 현황은 314개 병사에 31개 의료시설, 중앙공회당 1개, 예배당 2개, 각종 창고, 목욕시설, 화장실 등 824개 시설이 등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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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소에서 병원으로

5·16으로 소록도는 현역 군의관인 육군대령을 원장으로 맞는다.

군대식 재건사업이 이뤄져 한센인들이 계몽과 자립을 이룬 계기가 됐다는 시각도 있지만, 원장 중심의 권위적인 방식으로 환자들의 종교활동 등 다양성이 제한되고 억압받았다는 평가도 있다.

이즈음 가장 주목받았던 사건이 소록도 길목의 오마도 간척사업이다.

완치된 음성 한센인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의 사회 복귀를 돕기위한 재정착 사업과 농토확보를 위한 실험사업이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한센인들이 동원돼 추진됐지만 1963년 총선의 선거쟁점으로 떠오르면서 한센인들이 제외되고 사업은 전남도로 이관됐다.

이후 원생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으며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한센인 인권피해사건의 하나로 지적됐다.

이 시기 소록도병원의 이름이 갱생원에서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국립나병원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기존 수용격리정책이 치료 병원체재로 바뀌게 됨을 의미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수용인원이 꾸준히 감소해 1969년 3천900명대로 낮아졌다.

1970년대에는 육영수 여사 특별지원금으로 병동인 양지회관이 건립됐고 외국의 의료지원을 받아 결핵병동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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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는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87년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병원본관이 개관했다.

환자 수는 1979년 2천명대로 줄었고 1986년에는 1천명대로 낮아졌다.

1984년과 1989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소록도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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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는 995명으로 현재는 550명대로 감소했으며 소록도에 있는 원생 대부분은 완치됐거나 병력만 있는 음성 환자들로 양성환자는 9명뿐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소록도병원은 치료에 집중하면서 환자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하면서 사회인식도 많이 개선돼 한해 4천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찾아 원생들을 돕는 병원보다는 사회복지시설의 역할이 강화됐다.

betty@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2/11 10: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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