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의 반란' 부탄 축구전도사 유기흥 前감독 "기쁘고 뿌듯"
송고시간2015-03-18 11:06
(서울=연합뉴스) 김수현 기자 = "꼴찌팀인데다 제가 가르친 팀이 이겼다니 물론 기뻤죠."
유기흥(68) 전 부탄 대표팀 감독은 제자들이 일으킨 '꼴찌의 반란'에 신이났다.
유 전 감독은 18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그때 가르친 제자들이 전부 다 성장했고 당시 코치이던 초키 니마가 지금은 부탄 감독이 됐다"며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고 밝혔다.
1994년 미국월드컵 축구 예선에서 한국 국가대표팀 코치를 지낸 유 전 감독은 2007년부터 2년간 부탄 성인 축구대표팀과 청소년 대표팀을 지도했다.

(서울=연합뉴스) 고된 훈련을 받고나서 흙범벅이 된 부탄 축구 대표팀 선수들의 발. 유기흥 전 부탄 대표팀 감독이 2007년∼2008년 부탄 대표팀을 지휘하던 시절 찍은 모습이다. 2015.3.18 << 유기흥 전 부탄 축구대표팀 감독 제공 >>
photo@yna.co.kr
후배인 고(故) 강병찬 감독이 부탄 대표팀을 먼저 맡다가 암 투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임기를 채우고자 2006년 약 석 달간 부탄 대표팀을 맡은 게 인연이 돼 이듬해 정식 사령탑이 된 것이다.
유 전 감독은 "처음에 가보니 축구 수준이 너무 뒤떨어져 있어서 하루라도 빨리 가서 가르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며 "청소년부터 다시 뽑아서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쳤다"고 돌아봤다.
유 전 감독이 기억하는 부탄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부탄에는 경기를 펼칠 만한 제대로 된 운동장이 없었다.
선수들은 수업을 듣고 생업을 따로 하면서 선수 생활을 했다.
잘 먹지도 못해 감독이 선수들의 영양 보충을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부탄축구협회에서 약속받은 임금을 받지도 못한 그는 "이왕 하는 거 그냥 헌신한다고 생각했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서울=연합뉴스) 부탄 축구 대표팀을 맡을 당시 유기흥 감독(오른쪽). 유 전 감독은 2007년부터 2년간 축구 최빈국 부탄 성인 대표팀과 청소년 대표팀을 지휘했다. 2015.3.18 << 유기흥 전 부탄 축구대표팀 감독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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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전 감독은 어려운 환경에서 운동하는 선수들을 위해 스스로 '멀티 플레이어'가 돼야 했다.
유 전 감독은 "태릉선수촌처럼 선수들을 모아놓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훈련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오전 6시에 선수들을 깨워 수업 전에 기초 훈련을 시켰고 수업이 끝나는 오후 4시에는 근처 산까지 왕복 1시간을 뛰게 한 후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다"고 강도 높은 훈련을 지휘했다고 털어놨다.
요리사도 자청했다.
그는 "협회에서 예산이 없어 선수들이 잘 먹지 못했다"며 "현지에서 잘 먹지 않는 돼지 족발을 싸게 사서 푹 고아서 선수들에게 먹였고 닭고기도 사다 고아주고 닭볶음탕 같은 음식도 직접 해줬다"고 소개했다.
유 전 감독은 "밥을 잘 챙겨주니 선수들을 좋아하더라"라고 웃었다.

(서울=연합뉴스) 부탄 축구 대표팀 감독 재임 시절 선수들을 모아놓고 지시하는 유기흥 전 감독(가운데). 유 전 감독은 2007년부터 2년간 축구 최빈국 부탄 성인 대표팀과 청소년 대표팀을 지휘했다. 2015.3.18 << 유기흥 전 부탄 축구대표팀 감독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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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최하위인 209위 부탄이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에서 스리랑카를 3-1로 꺾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자 그도 덩달아 들떴다.
안타깝게도 선수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유 전 감독은 "세월이 흘렀고 선수들의 이름이 어려워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며 "코치가 그대로인데다가 그때 제가 가능성 있는 선수들을 많이 뽑았기 때문에 당시 선수들이 주로 뛰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유 전 감독은 "1차전에서 이겼다는 얘기를 듣고 감독에게 전화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부탄뿐 아니라 캄보디아, 네팔과 같은 축구 약소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지만 다시 가고 싶으냐는 말에는 대답을 망설인다.
유 전 감독은 "부탄에서 초청해주면 한번 갈 생각은 있지만 감독으로는 뭐…."라며 살짝 웃으며 "정말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기억"이라고 추억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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