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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① 내밀한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새기다

송고시간2014-05-07 09:44

창덕궁 낙선재① 내밀한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새기다 - 2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의 제24대 임금인 헌종은 순조의 손자로 1834년 8살의 나이에 즉위했다.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22살에 요절하면서 세손으로 책봉됐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당시는 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던 세도정치의 시대였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힘이 특히 강했는데, 헌종의 할머니인 순원왕후가 안동 김씨였다. 왕후는 어린 손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했다.

왕의 초상화인 어진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헌종은 용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또 여자를 무척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궁궐 밖에 오늘날의 카페 같은 기정(旗亭)을 짓게 하고, 변복을 한 뒤 그곳을 찾아가 몰래 여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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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색을 즐겼던 그의 첫 번째 부인은 15살에 가례를 올린 효현왕후였다. 효현왕후는 순원왕후와 같은 안동 김씨였는데, 자식을 낳지 못하고 혼례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에는 왕비나 세자빈이 될 처자를 왕실의 웃어른이 골랐다. 건국 초기에는 중매를 통해 훗날 비(妃)가 될 여성을 맞아들였으나, 세종 이후 '간택'이란 제도가 일반화됐다.

간택은 일종의 경연이었다. 나라에서 금혼령을 내려 비나 빈으로 적당한 양반가의 여식을 모은 뒤 세 차례의 심사를 거쳐 한 명을 최종적으로 낙점했다. 마지막인 삼간택에는 세 명의 후보가 올랐으며, 결정 권한은 대개 혼사의 당사자가 아니라 부모에게 있었다.

헌종은 효현왕후를 떠나보낸 뒤 1년 만에 두 번째 국혼을 치른다. 그에게는 왕통을 이을 후사가 필요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헌종이 계비를 뽑는 간택 과정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 왕이 간택된 규수들을 미리 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헌종은 삼간택에 남은 여성 가운데 김재청의 딸을 마음에 품었으나, 순원왕후는 홍재룡의 딸을 선택했다.

그러나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연유로 김재청의 딸을 다시 불러 후궁으로 삼고, 파격적으로 정일품인 빈에 책봉한다. 그가 바로 경빈 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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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樂善齋)는 헌종이 헌종이 정치 개혁과 왕권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1847년 건축한 건물이다. '선을 즐거워하다'는 뜻처럼 세상을 바꿀 기운이 태동하길 기원했다. 그는 낙선재를 서재 겸 사랑채로 활용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듬해 낙선재 옆에 새로운 건물이 지어진다. 경빈 김씨를 위한 처소인 석복헌(錫福軒)과 순원왕후가 기거한 수강재(壽康齋)다. 낙선재보다 소박한 두 건물은 담으로 나뉘어 있지만, 복도가 놓여 있어 왕래가 가능했다.

헌종과 경빈 김씨는 낙선재에서 사랑을 나눴으나, 두 사람 슬하에도 자식은 없었다. 헌종이 아버지처럼 이른 나이인 23살에 승하했기 때문이다.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들인 지 2년, 석복헌을 건설한 지 1년 만이었다.

비가 아니었던 경빈 김씨는 결국 인사동에 있던 사가(私家)로 돌아갔고, 여생을 홀로 쓸쓸하게 살았다. 석복헌은 '복을 내려주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녔지만, 경빈 김씨에게는 아픈 기억이 담긴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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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낙선재는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 고종이 갑신정변 직후 집무소로 사용했고, 국권을 빼앗긴 순종이 1912년부터 머물렀다.

더군다나 왕실의 침전이었던 대조전이 1917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낙선재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계비인 순정효왕후 역시 순종과 함께 낙선재에서 생활했고, 석복헌에서 숨을 거뒀다.

해방이 되고 전쟁을 거치면서 권력을 지닌 조선의 왕은 사라졌지만, 왕가의 후손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가택 역시 낙선재였다. 순종의 동생으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 고종이 환갑에 얻은 고명딸인 덕혜옹주가 기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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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과 1963년 고국에 돌아온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는 1989년 4월 열흘 간격을 두고 수강재와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종의 다음 대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덕혜옹주의 안타까운 사연은 5년 전 소설책으로 출간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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