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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는 안된다> ⑨해외 사례(영국)

송고시간2014-05-13 06:35

"유사 참사 반복은 없다"…실패 통해 재난방지 의식 키워힐즈버러 참사, 20여년후까지 경찰 부실대응 등 진상 규명 노력"재난대응 의식 정착없이는 매뉴얼도 무용지물"

지난달 15일(현지시간 ) 리버풀 구단 홈인 앤필드 구장에서 89년 힐즈버러 축구장에서 벌어진 대참사로 숨진 96명을 추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달 15일(현지시간 ) 리버풀 구단 홈인 앤필드 구장에서 89년 힐즈버러 축구장에서 벌어진 대참사로 숨진 96명을 추모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런던=연합뉴스) 김태한 특파원 = '재난은 있어도 똑같은 참사의 되풀이는 용납하지 않는다.'

영국의 재난대응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한 번 겪은 참사가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일은 드물다는 데 있다.

재난이나 대형 사고는 언제고 닥칠 수 있지만, 대규모 인명피해 같은 실패 사례는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사회의식이 재난대응 체계 안에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대형 참사를 통해 드러난 문제점을 집요할 정도로 파헤치고 곱씹어 사회 전체에 학습효과를 각인시키는 문화는 영국이 재난대응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배경이다.

100여 년 전 발생한 타이타닉 침몰사고는 여전히 영국인에게는 해상 재난에 대응하는 교범으로 통한다. 1989년 힐즈버러 축구장에서 관중 96명이 숨진 참사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대의 오점으로 반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

◇ 힐즈버러 대참사, 총체적 실패 = 지난달 15일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리버풀 구단의 홈인 앤필드 구장.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전·현직 리버풀 선수들과 리버풀 시민이 스탠드를 가득 메운 경기장에 96번의 조종이 울려 퍼졌다. 25년 전 리버풀 원정응원단으로 셰필드 힐즈버러 구장을 찾았다가 압사 참사로 숨진 96명을 추모하는 행사였다.

1989년 4월 발생한 힐즈버러 참사는 영국 역사상 최악의 경기장 재난으로 큰 상흔을 남겼다.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열린 힐즈버러 경기장에 엄청난 인파가 몰리면서 철책에 갇힌 관중들이 깔려 숨진 사고였다. 사망자만 96명에 이르렀고 766명이 부상했다.

피해 규모도 규모지만 안전 불감증과 늑장 구조, 부실 대응, 과실은폐 등 총체적 난맥상을 노출한 인재였다. 이 사고로 재난관리 선진국을 자부하던 영국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꺾였다.

사고발생 직후 재난대응 체계가 제대로 작동만 됐어도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신속한 인명구조가 절실한 순간에 경찰이 극성 팬들의 난동 때문에 사고가 벌어진 것으로 오판하면서 구급대의 투입조차 지연됐다.

훗날 진상조사위원회는 경찰이 현장에서 적절한 응급조치만 취했어도 희생자의 절반에 가까운 41명을 살릴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재난 당국이 부실대응을 넘어 과실 은폐까지 기도한 것은 영국 재난 대응역사에 심각한 오점을 남겼다.

재조사 논란 끝에 2012년 발표된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164건의 진술을 조작해 참사의 책임을 축구팬에게 돌린 것으로 나타났다.

애꿎은 피해자를 상대로 폭력 전과 조회와 음주조사를 벌이고 지역구 의원과 언론에 허위정보를 흘린 부도덕한 행위도 폭로됐다.

현장에서 적절한 응급조치만 취했어도 희생자의 절반 정도를 살릴 수 있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인정됐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마침내 피해자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진실 규명이 제때 이뤄지지 못해 유족에게 고통을 준 점을 인정하고 과실을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 재난은 소중한 예방학습 기회 = 진상 규명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은 힐즈버러 참사는 각 분야에서 재난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경기장의 안전규정에도 큰 변화를 불러 이후 모든 경기장의 관중석 철책은 철거됐다. 축구장 관중법이 제정돼 입석제가 폐지되고 좌석제가 의무화됐다. 이 덕분에 프리미어리그를 보유한 영국의 축구장 안전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영국은 1948년부터 법에 따라 재난대응 체계를 갖추고 각급 기관마다 재난 대응 매뉴얼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힐즈버러 참사 앞에서는 허점을 노출했다.

이는 재난현장의 개개인에게 철저한 재난대응 의식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매뉴얼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반성을 불렀다.

지금까지도 집요할 정도로 계속되는 진실규명과 반성 노력은 똑같은 재난이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사회 전반에 학습효과를 높이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 경찰은 힐즈버러 참사로 경찰감독위원회로부터 10년 넘게 1천444명이 사상 최대 규모의 감사에 시달려야 했지만 이런 과정은 재난사고 대응력을 높이는 순기능 역할을 했다.

존 골드링 조사위원장은 "비참하고 불쾌할지라도 참사의 진실은 철저히 규명돼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재난대응의 핵심은 '현장중심' = 영국 재난대응 체계의 핵심은 중앙 정부가 나서는 '톱-다운'(top-down) 방식이 아니라 일선의 재난 당국이 현장 지휘를 총괄하는 '보텀-업'(bottom-up)' 방식이라는 데 있다.

권한과 책임을 갖는 현장 지휘관을 중심에 두고 조직과 인력 등 필요한 지원체계를 집중하는 구조다. 재난 상황에서 대형 참사를 막기 위한 대응업무 종사자와 사고 관련 직업집단의 일차적 대응도 강조된다.

힐즈버러 참사는 재난대응 체계를 매뉴얼 중심에서 현장 대응력을 높이는 효율성 중심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해양사고는 해사연안경비청(MCA)에서 운영하는 선박구난관리대표부(SOSREP)가 구조 및 사고 수습을 통솔한다. 1993년과 1996년 대형 선박기름 유출사고 등을 겪으면서 현장 지휘권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이에 따라 재난사고가 발생하면 중앙정부는 해당 자치단체의 경찰과 소방 당국 등에 대응업무를 일임하고 큰 틀에서 정책적 지원과 조정 역할을 하는 데 집중한다.

그 대신 재난대응 업무에 필요한 긴급 예산편성이나 군병력 동원, 방사선 물질 등의 통제와 처분, 다른 나라 정부와의 공조 등은 중앙 정부의 몫으로 남는다.

지난해 12월 100년 만의 호우로 잉글랜드 남부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했을 때 인명 대피와 구조, 복구 등 작업은 자치 당국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2005년 7월 런던 지하철 테러 당시에도 런던경찰청이 총지휘권을 행사했다.

국가적 대형재난 때는 내각 중앙위기관리위원회가 전면에 나설 수 있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으로 제한된다.

영국 재난교육기관 EPG의 로니 커츠 이사는 "재난 사고가 터지면 지역 당국이 전면에서 신속히 대응하고, 방대한 매뉴얼이나 조직체계보다는 현장 효율성을 우선으로 하는 운영시스템에서 영국 재난대응 체계의 저력이 나온다"고 말했다.

t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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