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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전 38선 사진속 미군 "성공한 한국 자랑스러워"

송고시간2013-06-25 11:34

시카고 토박이 예비역 하사 크루거씨

"여기가 바로 북위 38도선"
"여기가 바로 북위 38도선"

한국전쟁 참전용사 루 크루거(84)씨가 61년 전인 1952년 10월, 38선 남측 표지판 옆에 서있다. 표지판에는 '여기가 바로 북위 38도00분00초/ FA OBSN BN 1사단이 측량한 좌표'라는 설명이 쓰여있다. 2013.6.25 chicagorho@yna.co.kr

(시카고=연합뉴스) 김현 통신원 = "한국전쟁은 나와 한국을 이어준 끈입니다."

24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 교외 '스카키 헤리티지 뮤지엄'(Skokie Heritage Museum)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전쟁 기념전시회를 찾은 참전군인 루 크루거(84)씨는 벽에 걸린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사진 속에는 '여기가 바로 북위 38도00분00초'라고 쓰인 표지판 위에 손을 얹은 젊은 미군 병사 한 명이 서 있다.

왼쪽 가슴에 '한국 1950~1953, 84사단 공병부대'라는 자수가 새겨진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백발의 크루거씨는 "61년 전인 1952년 10월, 38선 소재 미군 이동야전병원 '매쉬'(M.A.S.H.)에서 복무할 당시 전우 4명과 함께 트럭을 타고 가서 찍은 사진"이라며 "23세 때다. 그땐 나도 날씬했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시카고 토박이인 크루거 씨는 22세 때인 1951년 3월 미군에 징집돼 인천·서울·대구·평양 등에서 전투부대와 군수물자 이동을 위한 다리 건설과 도로 개설 작업을 했다.

 "사진 속 참전용사 61년 후"
"사진 속 참전용사 61년 후"

크루거씨가 1952년 10월, 북위 38도선 표지판 옆에서 찍은 사진 앞에 서있다. 2013.6.25 chicagorho@yna.co.kr

징집 당시 크루거 씨는 막 결혼한 새신랑이었고 전기공급업체 '컴에드'(ComEd)의 전신인 '파워앤드라이트'(Power and Light)의 전기기술자로 안정된 생활을 시작한 때였다.

그는 "그리움도 무더위도 힘들었지만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가 가장 힘들었다. 공병대원들은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찬물 속에서 작업해야 한다. 게다가 영하 25~30℃의 날씨에 천막 안 슬리핑백에서 잠을 잤다"며 "그러나 전투 폭음이 들릴 때면 공병대원인 것이 다행스럽게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1952년 봄 임진강 '자유의 다리' 건설작업에 투입됐다는 그는 "임진강 철교가 폭격으로 부서진 후 그 옆에 임시로 사용할 다리를 세웠는데 바로 그 다리로 정전 협정 후 남북 포로 교환이 이뤄졌다"며 자랑스러워했다.

1952년 가을에는 38선 주둔 야전병원 '매쉬'에 파견돼 전기배선작업을 했다. 그곳에서 수많은 부상자를 목격했다는 크루거 씨는 "또다른 전쟁은 안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신혼의 아내와는 소위 '달팽이 우편'으로 불리는 일반 우편이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그는 "파병 1년만에 부대에서 일본 오사카로 5일간의 휴양을 보내주었는데 거기서 아내에게 처음 전화했다. 당시 통화요금은 3분당 60달러(약 6만6천원)에 달했다"고 전했다.

 "내가 건설한 자유의 다리로 남북 포로교환이 이뤄졌죠"
"내가 건설한 자유의 다리로 남북 포로교환이 이뤄졌죠"

크루거씨가 61년 전인 1952년 임진강 '자유의 다리' 건설작업에 투입됐던 당시 찍은 사진을 들어보이고 있다. 2013.6.25 chicagorho@yna.co.kr

크루거 씨는 "한국의 산세를 지금도 기억한다"면서 "당시 '전쟁이 아니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한국전쟁 참전은 나와 한국을 이어주는 끈이 됐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낸 미군으로서, 자유 국가를 지킨 한국전 참전용사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크루거 씨는 지금도 매년 9월 미 전역의 84사단 공병대와 62사단 공병대가 3박4일 일정으로 함께 모여 전우애를 확인한다. 하지만 병들고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점차 늘어 이제 모이는 인원이 70~8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크루거 씨는 1953년 5월 하사로 전역한 뒤 '컴에드'에 복직해 42년간 일하고 1991년 은퇴했다.

9년 전 부인과 사별한 크루거 씨는 "일주일에 세번은 반드시 새벽 5시에 일어나 체육관에 간다"며 "네 자녀로부터 얻은 손주가 12명, 증손주가 3명이다. 이웃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고 일상을 소개했다.

그는 "3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을 견디고 일어나 세계 일류국가로 성장한 한국이 자랑스럽다"면서 "한국이 민주 정부 주도하에 반드시 평화통일을 이루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chicagor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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