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연극 '만선'
송고시간2013-05-11 15:20
'연극은 배우의 예술' 실감..침몰선 이미지 무대 인상적
(서울=연합뉴스) 강일중 객원기자 = 죽은 야생동물의 뼈처럼 앙상한 느낌을 주는 갑판 무대. 깊은 바다 속에 침몰해 비스듬히 땅에 처박혀 있는 듯한 어선의 잔해 형상이다. 그 위에 출렁이는 검푸른 파도. 금방이라도 다시 커다란 배를 집어 삼킬 것 같이 일렁댄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 위에 오른 연극 '만선(滿船)'은 등장인물들이 겪게 될 고통, 슬픔과 죽음을 암시하는 이런 이미지를 먼저 드러내 보이면서 시작한다. 이어 가난한 어부 곰치가 만선의 희망에 부푼 채 지나치리 만큼 자신감을 드러내는 첫 장면은 곰치와 그의 가족들에게 곧바로 들이닥칠 비극을 예고한다.
'만선'은 1964년 발표된 천승세 작가의 희곡으로 그 해 초연된 작품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으며 2008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인용될 만큼 잘 알려진 사실주의 명작이다.
곰치는 맷돌질이라는 고기떼 몰이 방식으로 칠산바다에 부서(맛·가격에서 보잘 것 없는 대접을 받는 민어과 어류)를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그는 만선의 희망 속에 부서를 판 돈으로 자기 배를 살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선주는 밀린 빚과 이자를 갚으라며 배를 묶어버린다. 당치도 않은 채무변제 계약을 다시 맺고 출어에 나서지만 풍랑 속에 아들 도삼을 다시 잃는다. 이미 세 아들을 바다 속에 묻어버린 그다. 그렇지만 곰치는 여전히 만선의 욕망을 떨쳐내지 못한다. 갓 태어난 아들이 열 살이 되면 그물치는 법을 가르칠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자식을 잃고 실성하다시피 한 아내 구포댁은 갓난 아이를 배에 실어 바다에 떠내 보낸다. 돈에 팔릴 운명에 처한 딸 슬슬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약 50년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무대의 힘, 배우의 힘에 의해 곰치 가족의 비극은 오늘을 사는 가난한 서민의 아픈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침몰한 배의 갑판을 형상화한 무대는 객석 맨 앞줄에 다다를 정도까지 뻗어 있다. 관객들을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부들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은 무대다. 갑판의 가파른 경사 무대는 등장인물들의 위태로운 삶을 반영한다. 무대 오른쪽의 어촌마을 집 형상에는 가난한 어부들의 찌들고 거친 삶의 모습이 짙게 묻어 있다.
연극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돛대 위의 난간에 선 곰치가 희망과 욕구와 좌절을 모두 표현하도록 한 연출이 돋보인다.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 주역은 물론 조역 모두가 하나 같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가족까지 희생시킬 정도로 만선 욕망에 집착하지만 역설적으로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곰치 역 한명구 배우의 연기는 불을 뿜어낸다. 구포댁 역을 맡은 황영희 배우의 연기는 감동적이다. 토속적 억양의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익살스러운 장면에서는 절로 웃음이 터지는가 하면 아들의 죽음 앞에 실성해가는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에만 두는 악질 선주 임재순 역의 김재건 배우의 연기에서는 중진 연기자의 힘이 느껴진다. 무당 역 이유정 배우는 짧은 시간 무대에 등장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 연극 '만선' = 예술의전당 자유연극시리즈 『한국 근대 리얼리즘 명작선』첫 번째 작품. 원래 신 호 연출이 무대화할 계획이었으나 지난해 말 불의의 사고로 숨지는 바람에 그와 절친했던 친구 김종석 연출이 대신 작품을 만들어냈다.
만든 사람들은 ▲작 천승세 ▲각색 김민정 ▲연출 김종석 ▲무대미술 이유정 ▲조명디자인 김창기 ▲의상 이유선 ▲음악감독 김정용 ▲음향디자인 정혜수 ▲영상디자인 김장연 ▲움직임 지도 양승희 ▲분장디자인 조미영 ▲소품 윤미연 ▲조연출 김지호.
출연진은 한명구·김재건·이기봉·황영희·최규하·최지훈·임형택·이진희·이유정·서광일·심원석·이효상.
공연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오는 15일까지. 공연문의는 예술의전당 ☎02-58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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