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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가는 독립공채'…상환약속 30년에 실적은 미미>

일제때 걸릴까봐 숨기고 태운 탓…연 5~6% 복리로 가치 폭등

(세종=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독립공채를 아시나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자 발행한 채권이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한민족 염원과 피땀의 상징인 셈이다.

그 빚을 갚겠다고 정부가 법으로 약속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연 5~6% 복리를 적용했기에 가치는 수백 배로 치솟았다.

그러나 상환 실적은 미미하다. 일제 때 혹시 걸릴까봐 땅에 묻었다가 잃어버리거나 아예 태워버린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간혹 유품 정리 때 발견하는 사례도 있지만 이젠 상환 문의조차 끊긴 지 오래다.

1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1983년 제정한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총 3차례의 신고기간에 상환한 규모는 57건, 3억4천여만원이다.

이 독립공채의 역사는 1919년 시작됐다.

당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원화 표시 채권을, 미주에서 달러 표시 채권을 발행한 것이다. 얼마나 발행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지 않았다. 달러채권은 1차로 25만달러 찍기로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화 채권 액면가가 100-500-1천원 3종이며 임정 초대 재무총장인 이시영의 직인이 찍혀 있고 발행금리는 연 5%였다. 이승만 임정 초대 대통령 이름으로 발행된 달러화 채권은 10-25-50-100-1천달러 등 5종으로 발행금리는 연 6%였다.

상환 시 연 단위 복리 이자를 적용키로 했다.

그럼에도 주권 잃은 나라의 채권이 국제시장에서 유통될 리 만무했다.

이를 기꺼이 사들인 사람은 우리 민족이었다. 성금에 가까웠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한 동포가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민사 기록을 보면 1910년대 사탕수수 농장의 하루 품삯이 70센트 미만인데, 10달러짜리 채권 하나를 사려면 월급을 고스란히 털어 넣어야 했다.

해방 이후 이들은 보상을 받았을까. 발행 당시엔 독립 후 5년에서 30년 내에 원리금을 갚겠다고 했으나,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1950년 6월 10일자에는 서울 명륜동에 사는 안모씨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간직해 온 100원권 독립공채를 상환해달라고 찾아왔으나, 재무부 직원이 법적 근거가 없다며 그냥 돌려보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1962년 1월 26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전북 군산의 이모씨가 일제시대 땅속에 묻어뒀던 독립공채 1천원권 3장을 상환해달라고 했지만 상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상환 근거는 발행한 지 60년이 넘은 1983년에 마련됐다.

정부는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기재부 국고국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법무부, 외교부 등이 참여하는 '독립공채상환위원회'를 설치했다.

특별조치법은 당초 남한에 거주하는 사람이 1984~1987년 신고한 독립공채에 한해서만 상환하도록 규정했다.

나중에는 1990년대 국교를 맺은 러시아ㆍ중국 등 54개국을 고려해 신고 기간을 연장했다. 중국의 연변방송, 흑룡강신문, 길림신문 등에 광고도 실었다.

그러나 신고 건수는 미미했다.

1차(1984∼1987년) 33건, 2차(1994~1997년) 1건, 3차(1998~2000년) 23건 등 총 57건에 액면 총액은 달러채권 2천150달러, 원화채권 1만610원에 불과했다. 달러 채권 1차 발행 예정액이 실제 25만달러였다면, 100분의1에도 못미치는 규모다.

이에 따라 정부가 상환한 금액은 1~3차에 각각 4천229만원, 564만원, 2억9천448만원으로 모두 3억4천여만원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공채 소지 자체로 처벌을 받으니 이를 숨기거나 태워버린 경우가 많아서 남은 게 많지 않은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특별조치법상 신고기간인 2000년 12월31일이 끝난 뒤로는 상환 문의조차 뜸해졌다. 간혹 문의가 오면 독립공채상환위원회가 국립과학연구소에 의뢰해 채권의 진위를 조사했지만 가짜로 판명나곤 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가짜가 나돈 것은 이자에 이자가 붙고 세월이 흐르면서 엄청나게 가치가 뛰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20년 100달러짜리 채권을 샀다면 단순 계산해도 지금은 2만2천565달러의 가치가 된 셈이다.

유명무실해진 독립공채상환위원회는 2009년 없어졌다.

최근엔 아예 문의 민원조차 없어진 실정이다. 기재부는 2011년 1건을 끝으로 상환 요청이 전무하다고 했다. 당시 기재부는 신고기간 종료로 당장은 상황이 어렵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도 '건국국채' 상환과 관련한 민원은 왕왕 들어오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별조치법 자체는 폐지되지 않을 전망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들이 가진 독립공채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이 독립하면 정부가 빚을 갚겠다'던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북한에 거주해 신고할 수 없었던 사람은 특별조치법상 대통령령으로 신고기간을 따로 정할 수 있다"며 "통일이 되면 굳이 신고 기간을 늘리지 않아도 시행령으로 상환 근거를 마련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잊혀가는 독립공채'…상환약속 30년에 실적은 미미> - 2
<사진 출처: 한국예탁결제원 증권박물관>

clap@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3/03/01 10:18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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