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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한중수교 기틀 닦은 중국 어뢰정 사건

송고시간2012-02-27 08:00

'인명구조' 명분 中해군함정 영해 침범..일촉즉발 위기김석우 前 통일부 차관 회고.."논리적이고 당당한 외교로 해결"

중공어뢰정 인수
중공어뢰정 인수

중공어뢰정 인수(본사자료)//1985.3.28(서울= 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4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서울=연합뉴스) 정묘정 기자 = 1985년 3월22일 새벽, 검푸른 어스름이 뒤덮인 전남 신안군 소흑산도 앞바다에 국적 불명의 어뢰정 한 척이 소리없이 떠내려왔다.

몇 시간 뒤 근처를 지나던 한국어선 제6어성호에 발견된 이 어뢰정의 정체는 중국 해군 북해함대 소속의 고속어뢰정 3213호. 배 안에는 중상을 입은 병사 2명과 사망자 6명 등 모두 19명이 타고 있었다.

3213호는 전날 저녁 다른 어뢰정 5척과 함께 기동훈련을 마치고 산둥반도의 칭다오(靑島)항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관에게 불만을 품은 병사 2명이 AK-47 자동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배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결국 3213호는 편대를 이탈해 동쪽으로 항해하다가 연료가 떨어지면서 흑산군도 근해에 표류하게 된 것이었다.

3213호의 표류 자체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가 이를 미리 예상하고 '비공식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에 사고 어뢰정의 구조를 요청해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중 간에는 아직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던 터라 구조 요청은 중국 관영매체인 신화통신 홍콩지사 관계자가 주홍콩 한국총영사관을 방문해 전달했다.

이에 따라 3213호를 처음 발견한 제6어성호는 어뢰정을 전북 부안군 하왕등도 부근으로 예인해 정박시켰고, 해양경찰청 측은 즉시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날 발생했다. 사라진 어뢰정을 찾아나선 중국 해군 함정 3척이 3월23일 오전 6시50분께 3213호가 정박해 있는 하왕등도 영해에 진입한 것이었다. 미리 구조를 요청해두긴 했지만 사실상 '적성국'인 한국 정부의 협조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영해를 침범한 해군함정은 중국 해군 내에서도 '최정예 부대'라 할 수 있는 3천900t LUDA급 DDG 109함과 1천500t급 예인함, 1천t급 PCS-705함 등이었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인명구조'였지만, 사전에 우리 정부에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영해를 침범한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 행위였다.

현장에 있던 우리 해군함정은 중국 함정에 즉각 퇴거를 요구했지만 중국 측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양측의 대치가 시작됐고, 결국 우리 공군 전술기까지 출동하면서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황이 조성됐다.

그 시각 국방부에서는 노신영 당시 국무총리 서리 주재로 관계부처 장관회의가 긴급 소집됐다. 국방부 측에서는 영해를 침범한 외국 군함을 즉각 무력으로 퇴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원경 당시 외무부 장관은 '평화적 해결'의 필요성을 역설해 간신히 외교적 노력을 위한 24시간의 말미를 얻어냈다.

그러나 중국과는 공식 외교창구가 없었기에 '우회로'를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외무부는 우선 주한미국대사관의 헨리 던롭 정무참사관과 주한일본대사관의 아라 요시히사(荒 義尙) 정무공사를 초치해 '중국 함정은 즉각 한국 영해 밖으로 퇴각하라'는 요구를 중국 외교부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지만 우리 측의 요구는 즉각 중국 측에 전달됐고, 중국 군함들은 우리 영해에 진입한 지 약 3시간 만인 오전 9시40분께 퇴각했다. 신속한 외교적 대처 덕분에 일단 군사적 충돌은 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골치 아픈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어뢰정 3213호와 승무원들의 처리 문제였다. 3213호의 표류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 이미 주한대만대사관 관계자들이 분주하게 외무부를 드나들고 있었다.

대만 측의 요구는 어뢰정과 승무원들을 대만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진수지(金樹基) 주한대만대사는 "어뢰정 승무원들을 귀순자로 봐야 하며 그들의 자유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외무부 내부에서도 이들을 대만으로 보내자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석우 당시 외무부 동북아1과장(전 통일부 차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중국 군함 안에서 해상반란 사건이 벌어진 것이므로 해양법 원칙에 따라 군함의 기국(旗國)인 중국으로 군함과 승무원을 송환해야 한다"고 이원경 장관에게 건의했다.

김 전 차관의 이 같은 건의는 밤새 국제법 서적을 뒤진 뒤 나온 것이었다. 국제 해양법은 해상반란이 일어난 경우 공해건 영해건 군함의 지위에 관한 기국(旗國)의 강력한 관할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해양법 형성 초기 단계부터 5대양을 지배하던 해양국가 영국이 그 기본틀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김 전 차관은 대학원에서 해양법을 전공했을 뿐 아니라 동북아1과장에 앞서 국제법규과장을 지낸 외무부 내의 '국제법통(通)'이었다. 초임 사무관 시절 대륙붕 제 7광구의 기초가 된 해양법적 근거를 찾아낸 것도 해박한 국제법 지식 덕택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우리 정부는 1983년 5월 발생한 중국 민항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중국 측과 정식국명을 적은 외교문서를 교환하는 등 이미 한 차례 '소통의 물꼬'를 터놓은 상태였다. 또 이범석 전 외무부 장관도 1983년 6월 국방대학원 특강에서 대(對)공산권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북방정책'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바 있었다.

중국 어뢰정 인수
중국 어뢰정 인수

중공어뢰정과 승무원에 대한 인수절차를 마친뒤 한국대표중 한명이 중공704함 승무원과 악수를 하고있다.//(서울= 연합뉴스)/본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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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정책의 연장선상에서라도 이번 일은 어뢰정 3213호에 대한 중국의 관할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김 전 차관의 생각이었다. 결국 우리 정부는 김 전 차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고 어뢰정과 승무원들을 중국으로 송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부는 중국 군함의 한국영해 침범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한 태도를 견지했다. 넘길 것은 넘겨주되 따져야 할 문제는 분명히 따지겠다는 것이었다. 외무부는 우선 중국 함정들이 우리 영해에서 퇴각하는 시점에 맞춰 영해 침범에 대한 엄중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날 주홍콩 한국총영사가 신화통신 홍콩지사의 외신부장에게 우리 정부의 항의각서를 전달하고 사과와 책임자 문책, 유사사건의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중국 정부 역시 우리 측의 항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중국 외교부는 우선 자국 군함들이 한국 영해를 벗어날 즈음 성명을 발표해 "실종된 어뢰정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해군 함정 3척이 '부주의'로 한국 영해를 침범했다"고 시인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3월26일에는 자국 군함의 한국 영해침범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는 각서를 주홍콩 한국총영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이 각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명을 받은(Authorized by)' 신화통신 홍콩지사 부사장이 주홍콩 부총영사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중국 측이 이 각서에서 사과의 가장 높은 단계인 'Apology'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중국 측은 영해 침범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은 물론 책임자 문책과 재발방지까지 약속했다. 이처럼 정중한 사과는 한중관계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 정부는 중국 측의 이러한 사과를 받아들여 이틀 뒤인 3월28일 오전 11시 양국의 중간 지점인 위도 36N, 경도 124E 지점에서 어뢰정과 승무원 전원을 중국에 인계했다. 이로써 일주일 동안 세계의 이목이 쏠렸던 중국 어뢰정 사건은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

훗날 드러난 것이지만, 이 사건은 이후 한중수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첸치천(錢其琛) 전 중국 외교부장의 회고록에도 생생히 기록돼 있다. 첸 전 외교부장은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에서 "1985년 4월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외교일꾼들에게 '이제 남한과 수교를 할 준비를 해야한다'는 지침을 줬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김 전 차관은 "만약 당시 어뢰정이 중국 본토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덩샤오핑이 추진하던 개혁개방 정책에 큰 차질이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 사회가 이완되는 다양한 징후가 나타났는데, 어뢰정 사건도 그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뢰정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더라면 중국 내부에서 개혁개방에 반대하던 세력이 덩샤오핑의 정책에 제동을 걸었을 것이고, 이는 자칫하면 덩샤오핑의 실권을 무너뜨릴 위험성마저 있었다는 게 김 전 차관의 분석이다.

김 전 차관은 덩샤오핑이 1985년 봄 한국 정부에 특사를 보냈다는 사실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당시 덩샤오핑의 특사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난 인물은 중국계 거물급 로비스트인 안나 셰놀트 플라잉 타이거 부회장이었다.

김 전 차관은 "셰놀트 부회장이 전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어뢰정 송환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감사의 뜻을 전했다는 사실을 최근 확인했다"면서 "그 자리에서 '수교'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장래와 관련해 큰 도움을 받았다'는 말이 전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1983년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에 이어 1985년의 어뢰정 영해 침범 사건이 중국이라는 존재 자체를 우리 사회의 안방에 들어오게 만든 또 다른 '역사의 초청장'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터뷰하는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
인터뷰하는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

(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이 27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985년 있었던 중국 어뢰정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12.2.27
dohh@yna.co.kr

김 전 차관은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 외교에 던지는 교훈이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한중관계에서 무조건 '저자세 외교'로 일관하기보다는 주장할 것은 분명히 주장할 때 오히려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전 차관은 "최근 우리 외교가에는 이른바 '중국 공포증'이 지나치다"면서 "물론 될 수 있으면 우호적으로 외교관계를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명백히 우리 입장이 옳은 상황에서조차 중국에 맞춰주는 외교는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 = 1968년 제1회 외무고시에 최연소 합격해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이래 주미ㆍ주일대사관과 본부 요직을 두루 거친 정통 외교관이다.

초임 사무관 시절 대륙붕 7광구를 기초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아주국장으로 근무할 당시 중국 및 베트남과의 수교를 성공적으로 매듭짓는 등 굵직굵직한 외교업무를 잘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업무 처리가 꼼꼼하고 친화력이 있으며, 아들인 김장현 외교부 다자통상협력과장과 함께 '부자(父子) 외교관'으로도 유명하다.

퇴임 후에는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으로 북한 급변사태를 다뤄왔으며, 최근에는 탈북자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충남 논산(66) ▲경기고 ▲서울대 법대 ▲외무고시(1회) ▲국제법규과장 ▲동북아1과장 ▲주일본 참사관 ▲아주국장 ▲청와대의전수석비서관 ▲통일부 차관 ▲국회의장 비서실장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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