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독버섯 `일진'> 손놓은 경찰ㆍ교육당국④
송고시간2011-12-29 03:03

(청주=연합뉴스) 변우열 기자 = 학교폭력을 연구해 학교에 만연한 `일진 문제'의 실상과 원인, 대책을 자료집으로 정리한 청주의 시민단체인 `마을공동체 교육연구소' 문재현(49) 소장. 이 연구소는 내년 초 자료집을 `일진 문화의 실상과 예방'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201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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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일진 은폐' 조장하기도
(청주=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 작년 8월 18일 오후 5시 청주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인근 중학교 3학년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인원이 70∼80명 정도 되자 영화에서나 보던 `길거리 격투'가 시작됐다. 한참 동안 집단으로 싸움을 벌이던 학생들은 어느 정도 우열이 가려지자 승자끼리 붙는 `1대 1' 결투를 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학생들은 부근 초등학교로 옮겨 계속 주먹을 겨뤘다. 학생들 사이에 `짱'으로도 통하는 속칭 `일진'을 가리는 자리였다.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중ㆍ고등학생들이 이런 식의 패싸움을 벌이는 것은 결코 비밀이 아니다. 학생들도 별로 주위를 눈길을 의식하지 않는다. 폭력적인 내용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할 정도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각 학교 주먹대장 자리에 오르는 `일진'은 학교폭력 등 교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행과 범죄의 진원지가 된다.
문제는 경찰이나 교육당국이 `일진'을 중심으로 한 교내 폭력조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무관심과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경찰과 교육당국이 `모르쇠'로 나온다고 해서 `일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학생들에게 `일진'은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자 매일 부딪쳐야 할 냉엄한 현실이다.
`일진' 문제를 오랫동안 조사해 온 충북 청주의 교사ㆍ시민단체 `마을공동체교육연구소'(소장 문재현, 이하 교육연구소)에 따르면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비행에 일진이 연관돼 있다.
집단구타, 폭행, 음주ㆍ흡연 강요, 왕따(집단 따돌림), 전따(학교 전체 따돌림), 투명인간(존재 자체 무시하기), 셔틀(갈취수단이 되기도 하는 심부름시키기) 등 수법도 다양하다.
교육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일진에서 비롯되는 폐해의 심각성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하다"면서 "그런데도 경찰과 교육당국이 손을 놓고 있으니 명백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경찰과 교육당국이 `일진' 문제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알고는 있지만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작년 8월 청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진' 가리기 싸움만 봐도 그렇다.
교육연구소 측이 이 사건의 대책을 질의하자 충북도교육청은 "언론에 보도된 내용 외에 아는 것이 전혀 없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거부했다고 한다.
충북지방경찰청은 "경미한 사건이며 일진과 관련된 제보도 없었다. 일진과 연관된 사건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고 답했다. 당시 청주 중학생들은 벌건 대낮에 초등학교 운동장 2곳을 옮겨가면서 2시간 넘게 패싸움을 벌였지만 흔한 경찰 순찰차 한 대 오지 않았다.
작년 2월 충북 청주에서는 중학교 1∼2학년생과 졸업생 70여명이 팬티만 입고 시내 한복판을 질주하는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졌다. 이들과 친분이 있는 고교생 `일진'이 소집한 속칭 `졸업빵'이라는 촌극이었다.
다른 시도 경찰과 교육청도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다.
교육연구소가 지난 5월 전국 16개 시ㆍ도 교육청에 `일진이 존재하는지' 질의한 결과, 전 교육청이 한결같이 `일진은 없다'고 응답했다.
`구체적인 일진 대책 프로그램이나 대응 지침이 있는지'도 물었지만 역시 `없다' 또는 `밝힐 수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한술 더 떠 광주시교육청은 "일진에 대한 조사는 아이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강원도교육청은 "폭력서클 대책은 경찰이 담당하는 것이 효율적이며, 교육청이 관련 자료를 갖고 있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교육연구소가 각 시ㆍ도경찰청에도 비슷한 질문을 했지만 결과는 대동소이했다. 일진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 놓고 있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현재 경찰이 학교폭력과 관련해 하고 있는 것은 학기 초인 매년 2차례 '학교폭력 자진신고 및 피해신고 기간'을 운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놀랍게도 충북, 경북. 제주 3개 지방경찰청은 이 단체의 질의를 받고도 일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경북지방경찰청은 지난해 `전년도 학교 불량서클 현황'을 묻는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박영아(한나라) 의원의 국감 질의에 "16건을 파악하고 있다"고 답했다,
경찰과 교육당국의 부정과 달리 `일진'의 존재와 폐해를 확인할 수 있는 조사결과는 의외로 많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 작년 1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서는 응답자의 16.5%가 "일진이 있다"고 했고, 교육연구소가 올해 4월 충북도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일진'의 존재를 인정한 응답이 28%에 달했다.
경찰의 통계도 있다. 2006∼2010년 5년간 전국 시ㆍ도 경찰청에 접수된 `일진' 피해 신고는 경기 370건, 서울 214건, 부산 120건 등 총 857건에 달한다.
청주시내 초등교에 재직하는 한 교사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일진연합'이 조직돼 있다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라면서 "경찰과 교육당국이 일진 문제를 축소, 은폐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경찰이 일진 문제의 은폐를 조장하고 있다는 증언도 나온다.
청주시내 한 초등교 교사는 "'학교폭력 자진 신고기간'을 앞두고 지난달 경찰 주최 연찬회에 나갔더니 충북경찰청 담당자가 '사건이 생겨도 즉시 신고하지 말고 자진신고 기간에 처리해야 불입건돼 일이 커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라고 전했다.
교육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아이들이 처벌받는 것을 막는다거나 신상정보를 보호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일진 관련) 사건을 은폐, 축소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면서 "이는 바늘도둑을 소도둑으로 키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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