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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열전> 우루과이 쌀협상서 '日 몽니' 눌렀다

외교열전, 선준영 전 UN대표부 대사
외교열전, 선준영 전 UN대표부 대사(서울=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선준영 전 유엔 대표부 대사가 19일 서울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며 지난 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 쌀 협상 당시를 회고 하고 있다. 2011.12.19
koss@yna.co.kr

선준영 前차관 회고..韓 유리한 조건얻자 日 발목잡기
벼랑끝 전술에 日 태도바꿔..對美협상서는 '복수안' 묘수

(서울=연합뉴스) 강병철 기자 = 우루과이라운드 다자협상의 막판 교섭이 진행됐던 1993년 12월 14일 스위스 제네바의 한 호텔.

한국과 미국이 최종 합의한 농산물 협상 내용을 놓고 일본, 호주 등 관련 7개국과 고위급 실무협상을 벌이던 우리측 대표 선준영 외무부 제2차관보가 협상 시한을 불과 4시간가량 남긴 새벽 2시께 갑자기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한미간 농산물 협상에 대해 7개국 모두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하면 어렵사리 성사시킨 미국과의 쌀개방 협상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자 일종의 '벼랑끝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선 차관보가 이런 전술까지 생각하게 된 것은 일본 때문이었다. 한국보다 불리한 조건으로 미국과 쌀시장 개방에 합의해 '체면'을 구긴 일본은 관련 7개국 협상에서 한미간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발목잡기로 일관했다.

그러다 협상 막판에 이르자 일본은 "농산물협정의 다른 품목에서 적절한 시장접근기회가 부여될 것"이란 조항을 추가해야 한다고 몽니를 부렸다. 이 말은 한국이 일본보다 쌀시장 개방이 유리하게 됐으니 다른 농산물은 더 개방하라는 주장이었다.

이 독소조항을 받아들이면 우리 쌀 협상은 그야말로 끝이었다. 그래서 선 차관보는 "농산물협정의 다른 품목에서 이미 적절한 시장접근기회가 부여됐다"는 표현을 마지노선으로 제시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판이 깨져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초강수를 꺼내들고 회의장을 나갔다.

그의 이 벼랑끝 전술은 주효했다. 협상결렬의 책임을 뒤집어쓸 것을 우려한 일본은 '울며 겨자먹기'로 이를 수락했기 때문이다.

1986년 우루과이의 해변도시 푼타 델 에스테에서 시작된 우라과이 라운드(UR) 쌀개방 협상은 막판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한 노련한 외교관의 수완으로 최종 타결의 고비를 넘기게 됐다.

◇쌀 협상서 日 누르다 = 우리의 쌀시장 개방문제는 1990년 12월 처음으로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됐다. 이때 UR 각료회의에서 UR협상이 최초로 결렬됐었는데 한국과 일본, EC(유럽연합의 전신)가 쌀 개방 문제가 포함된 농산물위원회의 최종 협상안을 거부한 것이 이유가 됐다.

종로거리를 점거한 시위자들
종로거리를 점거한 시위자들우루과이 라운드 협상타결로 쌀시장 개방이 불가피해지면서 전국 농민들은 곳곳에서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은 종로거리를 점거한 쌀수입개방반대 시위자들.//(본사자료)1993.12.11(서울=연합뉴스)//

<저작권자 ⓒ 2005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미국은 우리의 이런 반대를 문제 삼았다. 직전에 개최한 한미 정상회담 등에서 우리가 미국에 "UR 협상의 성공적 타결을 위해 긴밀히 협의한다"고 약속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런 약속이 있었는데도 우리 정부가 미국에 사전에 통지하지 않고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을 미국측이 문제 삼은 것.

미국의 문제제기는 결국 한미간 통상마찰 사건으로 비화됐고, 우리 정부는 졸지에 국제적으로 '신의'를 지키지 않는 나라가 됐다. 결국 정부는 각료회의 대표를 맡았던 박필수 상공장관을 경질하고 부랴부랴 대외협력위 회의를 소집, "농산물 4개 외에는 관세화(개방)하되 여의치 않으면 쌀을 빼고 다 개방한다"는 협상안을 다시 만들었다.

이어 정부는 당시 선준영 주체코 대사를 차출, 1991년 1월 재개된 UR 무역협상위(TNC)에 수석대표로 파견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양보안을 관철하라는 훈령과 함께 "한국이 반대해 1991년 협상이 결렬된 게 아니다. 한국의 입장을 언론이 왜곡했다"고 핑계를 대라는 지침을 받았다.

하지만 TNC가 소집된 제네바의 분위기는 한국이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잘못 핑계를 댔다가는 또다시 신의 없는 나라로 몰릴 판이었다. 이에 선 수석대표는 즉각 외교부 본부에 전보를 쳐 '작전 변경'을 통보했다. 언론 핑계를 대지않고 새로운 협상안을 들고 왔으니 성실히 교섭하겠다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겠다고 보고한 것이다.

그는 이어 TNC 의장을 맡은 아서 둔켈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사무총장을 만나 둔켈 총장의 연임 지지를 같이 언급하는 조건으로 TNC에서 첫 발언권을 따냈다.

아무래도 첫 발언을 해야 우리가 상당히 양보한 협상안을 갖고 왔다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 우리와 비슷한 처지였던 일본이 먼저 발언할 경우 우리의 협상안이 묻힐 수 있다는 고려도 작용했다.

그의 이런 판단은 적중했다. 그의 첫 발언에 대해 다른 참가국은 "한국 대표의 발언을 평가한다"면서 좋은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우리보다 늦게 발언한 일본은 어이없게도 "일본 때문에 이전 협상이 결렬된 것은 오해"라면서 언론 핑계를 댔다. 이 때문에 일본은 기존보다 양보한 안을 발표했음에도 냉랭한 반응을 얻었다.

이어진 본협상에서도 우리는 시종 일본에 대해 우위를 이어갔다.

1993년 12월13일 최종 합의한 한미 농산물협정은 이런 우위의 결정판이었다.

'관세화 유예기간 10년, 최소시장 접근비율 1∼4%'을 골자로 한미가 합의한 내용은 일본이 앞서 미국과 합의한 '관세화 유예기간 6년, 최소시장 접근비율 4∼8%'에 비해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라는 것이 당시 제네바 외교가의 평가였다.

이런 성과는 치밀한 준비가 있어 가능했다. 통상 이런 대형협상에서는 선진국이 초안을 만들었지만, 선진국 입장을 토대로 한 초안으로는 우리의 이익을 담보할 수 없다고 보고 선 수석대표는 직접 초안을 만들었다.

그는 그러면서 초안을 두 개의 버전으로 만들었다. 우리 입장만 반영된 A안과, A안에 비해 양보했으나 여전히 우리에게 유리한 B안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A안을 밀어붙여 미국이 계속 반대하면 막판에 B안을 내밀어 관철시키는 작전을 폈다.

상황은 전략대로 돌아갔다. A안에 난색을 표하던 미국은 결국 협상 시한에 쫓기자 B안을 전격 수용했다.

125800-우루과이 라운드(UR) 재협상과 국회비준 거부 농민대회.
125800-우루과이 라운드(UR) 재협상과 국회비준 거부 농민대회. (서울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전국 농민대회에 참가한 농민 2만여명이 ‘우루과이 라운드(UR) 재협상과 국회비준 거부’를 촉구하며 대회를 열고 플래카드와 깃발을 들고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1994.2.1 (본사자료)

<저작권자 ⓒ 2009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다자협상 경험이 더 풍부했던 일본이 쌀 협상에서는 판정패 당하는 순간이었다.

일본이 이어진 관련 7개국 고위급 실무협상에서 몽니를 부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행계획서 수정파문 = UR에서 쌀개방 협상이 유리한 조건 속에 타결됐음에도 국내적으로는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쌀개방 불가 방침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UR협상이 타결되자마자 허신행 농림부 장관 등을 경질했다.

수습되는 듯했던 UR협상은 1994년 3월말 UR 이행계획서 수정파문 사건으로 다시 국내외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한국은 UR 협정에서 비관세화한 쌀을 빼고 나머지 농산물 전체를 통틀어 평균 24%의 관세를 인하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이행 계획서를 제출하기 위해 확인해보니 협상 과정에서 모두 2.7%포인트 더 내린 것으로 나타났고, 정부가 이를 임의로 24%로 고쳐 GATT 사무국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를 두고 미국 등에서 당시 북핵 문제에 빗대어 "국제사회를 속여 핵개발을 한 북한이나 이행계획서를 마음대로 바꾼 남한이나 무엇이 다르냐"는 비판도 나왔고 국내 정치권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이회창 총리 주재로 총리공관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이 자리에서는 이행계획서에서 공산품 분야도 일부 수정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총리는 "모두 원점으로 돌려놓으라"고 지시한 뒤 1994년 4월5일 "협상을 잘했으면 이런 보완ㆍ조정이 필요 없었을 것"이라면서 "당초 협상이 미흡한 점을 사과한다"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UR 협상은 우리나라가 참여한 다자협상 가운데 최초의 '외교적 쾌거'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협상을 둘러싸고 표출됐던 국내적 논란과 정부의 통상능력을 감안할 때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던 사례였다는 게 외교가의 분석이다.

선 전 차관이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건국 이후 지금까지 한 협상 중 쌀 협상이 처음으로 제대로 한 협상이었다"고 회고하면서도 UR협상이 전체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미숙했다는 점을 같이 지적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를 도외시한 채 정치권은 "쌀 한 톨도 들여올 수 없다"는 포퓰리즘식 태도를 견지해 협상을 더 꼬이게 했고 농산물부터 공산품까지 여러 분야가 망라된 UR협상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당시 통상관료의 전문성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선준영 전 차관 = 외교부 내에서 손꼽히는 경제ㆍ통상통으로 세계무역기구(WTO)등 국제기구에도 널리 알려진 통상외교 전문가다.

외무부 2차관보 시절 한미자동차 통상마찰 등 대미통상현안을 잘 마무리했고, 제네바 대사로 근무하면서 유엔군축회의와 세계무역기구(WTO)서비스이사회 및 유엔인권위 의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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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eco@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1/12/19 08: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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